스타트업 규제 애로…“법·제도 현실에 맞춰야”
글로벌 100대 유니콘 중 17곳 사업 불가
혁신기업들이 기술을 개발해도 여전히 낡은 규제와 시설 부족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발전 속도를 현실이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전문가들은 법과 제도를 현실에 맞추고 다각적인 맞춤형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24일 스타트업 업계에 따르면 다수의 신생 혁신기업들이 규제로 인한 애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I를 활용한 비대면 진료를 제공하는 ‘닥터나우’는 최근 국내에서 최신 기술을 펼치지 못해 해외로 눈을 돌린 대표적인 곳이다. 설립 5년 차인 닥터나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환자들에게 시범사업 성격으로 허용된 비대면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내 의료법에 따라 약 배송은 여전히 제한돼 있어 비대면 진료와 약 배송 등 원격 의료 시스템이 모두 법제화된 일본으로 건너가 증상 중심의 비대면 진료 서비스 앱 론칭을 준비하고 있다. 김하린(가명·28) 씨는 “최근 감기에 걸려 닥터나우에서 비대면 진료를 받았지만 약 배송은 불가하다고 해서 아픈 몸으로 약국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나마 로봇업계는 고질적으로 실증 공간 부족이나 실외주행 불가 등의 문제를 겪어왔지만 지난해 관련 법 개정으로 사업에 탄력이 붙는 모양새다. 지난해 10월에는 도로에도 로봇이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이, 11월에는 로봇이 운행안전인증을 받으면 보도 주행이 가능하다는 ‘지능형로봇법’이 각각 개정·시행됐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자체 기술로 개발한 실외배달로봇 ‘딜리’는 지난해 11월부터 강남구의 ‘테헤란로 로봇 거리 조성사업’에 투입돼 도로를 주행하게 됐다. 배민은 2017년 서빙 로봇 개발을 시작해 2018년부터 ‘딜리’의 공개 테스트를 진행하며 시범사업을 선보였지만, 당시에는 로봇의 도로 주행 자체가 가능하지 않아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아한형제들 관계자는 “지난해 관련법이 연달아 통과되면서 배달 로봇도 인도로 다닐 수 있게 돼 저희 서비스를 선보이는 게 가능해졌다”라며 “법 개정 전에는 배달 로봇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불법이어서 사유지나 규제 샌드박스 특례 허가를 통해 제한된 범위에서만 테스트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금융 기업들은 기존 규제로 인한 사업 불가능, 빅데이터·클라우드 등 최신 IT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는 망 분리 규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한국핀테크산업협회 산하 정책위원회가 활동을 진행한 결과, 업계에서는 △선불 충전금 정보 기록관리시스템 도입 이슈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시행령 개정 관련 대응 △신용정보법 시행령 개정 대응 등과 관련한 애로사항을 언급했다.
한국핀테크산업협회 관계자는 “핀테크 기업들은 더딘 규제 개선, 경기침체로 인한 투자 약화 등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며 “수익모델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규제 환경으로, 과도한 규제로 인해 자율성 확보가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업계에서는 디지털 금융 발전에 부합하는 제도와 규제 체계 개편이 이뤄지면 서비스를 고도화하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말했다.
해외 기업이 국내 규제로 인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 중 17개는 국내 창업이 불가능하거나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 레볼루트(revolut)는 송금 서비스부터 암호화폐를 구매, 보유 및 교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레볼루트는 국내에서 인터넷전문은행 설비 및 운영에 관한 특례법, 전자금융거래법, 개인정보보호법, 데이터보호법 등의 제약을 받아 사업이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혁신 기업 육성을 위해 현실에 맞춘 법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각적인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김재현 한국경영자총협회 규제개혁팀장은 “2022년 일본은 2027년까지 10조 엔(약 88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스타트업 5개년 계획을 세웠다”라며 “반면 우리나라는 신산업 육성이 저조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스타트업 지원책을 활발하게 펴야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기업들의 지속 가능한 성장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경준 한국로봇산업협회 기획산업본부장도 “로봇은 부품부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시스템까지 맞물린 어려운 산업이지만 분명히 성장세는 지속되고 있다”라면서 “중앙부처나 지자체가 대규모 인프라 구축하는 데는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릴 수 있으므로 민간 영역에서도 로봇 친화적인 정책을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신제품·신기술을 선보이는 기업들을 위해 기존의 규제를 면제해주는 ‘규제샌드박스’ 제도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규석 한국경제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규제샌드박스 제도는 2년 동안은 사업을 자유롭게 할 수가 있지만 1년이 지나면 기간 연장을 신청해야 하고 승인 시 총 4년이 주어진다”라며 “기업들은 연장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사업을 해야 하는 구조”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은 규제샌드박스 신청부터 시작해 승인 시까지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되고, 기간이 지나면 신산업에 대해 정부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이나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