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ㆍ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필수의료도 수가·법적 뒷받침 문제
핵심인재 ‘의대쏠림’ 진정 해법 없나
종교적·정치적 확신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무오류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theory)은 법칙(law)이 아니기에 늘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따라서 이론적 귀결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반증가능성’을 닫아 놓으면 과학이 아니다. 같은 논리로 오류가능성을 닫아 놓으면 ‘정책’일 수 없다.
한국 갤럽의 조사에 의하면, 추석 직전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20%대로 최저를 기록했다. 부정적 평가요인으로는 ‘의대정원 확대’가 18%로 제일 높다. 하지만 놀랍게도 긍정적 평가요인으로 외교(15%)에 이어 의대정원 확대(14%)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수험생, 학부모, 입시 학원가는 의대 증원을 열렬히 환영한다. 의대 증원은 국민을 두 쪽으로 갈랐다.
의대증원의 최대 논거는 한국에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2020년 현재 인구 1000명당 한국의 의사수가 2.5명으로 프랑스 3.2명, 독일 4.5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7명에 비해 적다고 한다. 하지만 ‘양적 지표’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회피가능한 사망률’은 다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회피가능한 사망률은 질병 예방과 적절한 치료로 막을 수 있는 사망을 의미하며, 보건의료 서비스의 질과 효율성을 나타낸다. 한국의 회피가능한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2020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142명으로, OECD 평균 239.1명보다 훨씬 낮다. 한국의 1인당 연간 진료 횟수는 2021년 기준 15.7회로 OECD 평균 6.8회보다 크게 높다. 한국의 의료문제 본질은 ‘의사 수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지역·필수의료 파행’도 의대증원의 최대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문제도 ‘시스템의 문제’로 의대 입학정원이 부족해서 유발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의사가 부족한 진료과목은 흉부외과, 소아청소년과, 외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등이다. 정부의 요구대로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리면 의사가 부족한 진료과목으로 미사일이 유도되듯이 의사자원이 그쪽으로 배분될까? 필수의료 기피 현상은 낮은 의료수가 그리고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보호 부재’에 기인한 것이다.
수도권 외 지역에 의사가 가지 않는 이유는 환자들이 지역의료 이용을 꺼리기 때문이다. 비근한 사례로 이재명 대표도 지역응급의료 서비스를 거부하고 헬기 편을 통해 서울로 향했다. 2000년 건강보험 통합 이후 권역별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되면서 지역의료를 기피하는 풍조가 구조화됐다. 이 역시 의사 수 부족과는 거리가 멀다.
의정(醫政) 갈등은 정부에 의해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지금도 “왜 매년 2000명씩 1만 명의 의사를 늘려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따르라는 식이다. ‘그동안 의사가 정부를 무릎 꿇게 했다’는 식의 언론플레이는 이번에는 ‘의사 차례’라는 암묵적 으름장으로 읽힌다.
보건복지부는 2024년 2월 ‘보건의료 재난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에 따라 보건의료 재난 위기경보를 ‘경계’에서 ‘심각’ 단계로 상향했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의사파업을 ‘전염병 창궐’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5월 ‘외국의사’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추진하기 위해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정부는 문제를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료계 단일안’을 가져오란다. 그 논리가 맞다면 노동정책을 시행할 때 ‘한국노총, 민주노총, 경총’에도 단일안을 주문해야 한다.
의대증원을 둘러싼 갈등이 잦아들지 않자, 올해는 “예정대로 (진통 끝에 1497명으로 조정) 선발하고 2026년부터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한다. 이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신입생을 아직 선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2025년부터 원점 재검토를 못 할 이유는 없다. 결국 ‘마지막 골든타임’을 놓쳤다. 그러면 2026년에 입학정원을 원래 상태로 되돌릴 만큼 감축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2026년에는 대통령선거와 연결되어 입학정원 조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국은 미래 신산업을 주도할 핵심인재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대한민국만 고급인력이 ‘피부미용, 성형외과, 도수치료’로 빠지는 것이 옳은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러다가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서 한국만 패자(loser)로 남을까 심히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