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공으로 색다른 마케팅…골프박람회·LPGA 후원도
열악한 환경에서 볼 하나로 골프용품시장에 지각변동을 몰고온 기업인이 있다.
컬러볼의 신화창조를 이룬 ‘히든 챔피언’ 볼빅 문경안 회장(54). 그를 만나러가 간 시간이 마침 점심시간. 대뜸 “보신탕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었다. 허름한 식당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볼빅에 얽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제 볼빅이 엄청난 성장을 했고 브랜드 가치도 높아 어깨에 힘도 들어갈만 할텐데 그는 여전히 마음씨 좋은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였다. 직원이 200여명이나 되는 ‘강한 작은 중소기업’의 회장 명함을 내밀지만 여전히 발로 뛰는 비지니스 맨,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었다.
-2009년 볼빅을 인수한 결정적인 계기는
▲“‘히든 챔피언’이었죠. 독일의 초일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의 경영서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작지만 강한 기업들만 모은 진귀한 책이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낯설지만 세계시장을 제패한 중소기업의 성공비결 등을 상세하게 담아낸 책이었는데 볼빅 인수제의를 받던때 마침 이 책을 읽던 터라 남이 하지 않는 것으로 승부하고 싶었던 거죠. 뭔가 다르게 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전혀 생소한 분야였을텐데
▲“원래 골프마니아여서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았습니다. 시장조사를 해보니 볼빅의 기술력이면 세계 유수의 볼 메이커들과 한판붙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처음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죠.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수개월간 시장조사를 하는 동안 처음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골프볼을 늘 쓰는 소비지입장에서 장고에 들어갈수밖에 없었죠. 이미 투자를 결심한 상황에서 ‘이거다’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던 얘깁니다.”
-누군가 도움을 줬나
▲“평소 친하게 지내던 포천힐스CC 이동주 사장이 다를 놨어요. 가격도 적당하니까 볼빅을 인수해서 한번 경영을 해보라는 것이었죠. 결정을 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볼빅 특허와 품질력을 보고 바로 결정했다고 보면 됩니다.”
-실마리는 어디서 풀렸나
▲“국내 볼 시장은 프리미엄급이 70% 정도됩니다. 내가 골프할때도 가격차이가 나도 이왕이면 좋은 볼을 씁니다. 이때 중저가만을 생산하는 국산볼에서 벗어난 고급볼로 가자는 결론을 내린거죠. 품질만 뛰어나면 소비자는 찾게 돼 있으니까요. 한가지 더 보태자면 컬러를 확실하게 도입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묘하게도 컬러마케팅과 고품질, 고가정책이 맞물려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국내 시장만 보지는 않았을텐테
▲“그럼요. 무조건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기위해 욕심을 냈습니다.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시장을 넘어 미국과 유럽에도 볼빅 브랜드를 심어놔야죠. 이미 중국은 볼빅 브랜드가 뜨고 있습니다. 미국도 여자프로골프(LPGA)를 다방면으로 후원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고요.”
문경안 회장은 강점이 있다. 볼빅을 인수하고 나서 다른 사람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했다. 특히 못오를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지만 그는 오른 만큰 이익이라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어떻게 오를까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볼빅은 단단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볼에 집중하면 2년만에 볼빅은 3% 점유율에서 30% 까지 끌어 올린 문경안 회장.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그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시간을 되돌려 보자. 그는 경북 김천태생이다. 1977년 서울에 터를 잡았다. 세무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꿈의 직장인 대기업 ‘종합상사 맨’이었다. 수출입업무를 보면서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리고 건설사 통산관련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모기업이 부도가 났다.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고민하다가 1997년 철강유통업에 손을 댔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한보철강이 부도가 나면서 이것이 기회가 됐다. 현금만 있으면 철강재를 값싸게 구입할 수 있었기에.
-철강유통업은 잘 돌아갔나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사업을 처음하다보니 돈도 떼이고 위기를 여러차례 맞았습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만해도 죽을 맛이었죠. 사업이 녹녹치가 않다는 것을 안 셈이죠.”
-볼빅이 사업의 기폭제역할을 했나
▲“한동안 1주일 일을 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볼빅, 주말은 철강사업을 병행했죠. 하지 않으면 몸살날 정도의 골프라운드도 조금 자제를 하고 볼빅의 신장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마케팅이 주요하게 먹히면서 볼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깜짝 깜짝 놀라때가 있습니다. 물론 볼빅을 사랑하는 골퍼들에게 무한 감사를 드리죠.”
볼빅에 대한 열정은 그의 골프와 무관하지 않다. 1990년 이전 직장 본부장 시절에 클럽에 손을 댔다. 연습을 하루에 5시간. 출근전 오전 5시30분부터 2시간 연습하고 출근했고 점심시간에 다시 1시간, 퇴근 시간후 다시 2시간 클럽을 휘둘렀다. 2개월 뒤 머리를 얹으러가서 18홀 108타를 쳤다. 8개월이 지나 필드에 10번째 나가 79타를 쳤다. 베스트 스코어는 4언더파 68타. 신원CC에서 아마 최고수인 클럽챔피언도 차지했다.
-볼빅은 어떤 기업이길 바라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적 기업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볼빅은 사회에 공헌하는 ‘고용창출’을 첫번째로 꼽고 있지요. 기업은 고용없는 성장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무조건 고용을 통한 기업성장이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음성 볼 공장은 24시간 가동한다는데
▲“제조업의 특성입니다. 24시간 풀가동하고 365일 하루도 쉬지 않습니다. 본사도 오전 7시30분 출근해 보통 오후 11시까지 근무하는 직원이 적지 않습니다. 밤샘을 하는 직원들도 있고요. 볼빅은 직원들이 휴일에도 출근하고 싶은 그런 직장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
-올해 목표는
▲“국내 골프볼 시장 점유률 40%까지 끌어 올릴 계획이다. 연 매출 400억원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100만 더즌을 생산하는데, 200만 더즌의 제 2공장 설립중이다. ”
볼빅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골프 박람회, 선수 및 국내투어 후원 등을 지나 이번에는 세계 최고의 여자프로골퍼들이 활약하는 미국LPGA투어 대회의 후원업체로 나섰다. 19일 끝난 RR 도넬리 파운더스컵이다.
한국선수 뿐 아니라 출전선수 (총 132명, 커트통과자 76명)의 캐디들은 상의에 덧입는 조끼(bib)에 볼빅(Volvik) 로고를 달고 짧게는 이틀, 길게는 4일동안 필드를 누볐다. 볼빅은 지난해에도 투어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챔피언십과 숍라이트 LPGA클래식에서 캐디 빕에 볼빅 로고를 부착해 대회기간 내내 이를 노출시켰다. 특히 그날의 샷을 뜻하는 ‘VOLVIK 샷 오브 더 데이’를 생방송으로 내보냄으로써 전세계에 볼빅 브랜드를 알렸다.
현재 LPGA 투어프로 가운데 볼빅 볼을 사용하는 선수는 로라 디아즈, 크리스틴 송, 이미나, 장 정 등 18명을 넘는다. 볼빅은 또 한국여자프로골프 시니어투어의 타이틀 스폰서다. 지난 1월 올랜도 PGA머천다이즈쇼에 이어 지난 16∼18일에는 중국에서 열린 ‘베이징 국제골프용품박람회’에도 출품했다. 아울러 중국 남자프로와 주이어선수와도 후원계약을 하며 글로벌 브랜드로 입지는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