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창조경제라는 화두를 던졌다. 몇년 전부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창조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 1등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이후 재계에서도 창조경영 열풍미 불고 있다. 하지만 창조라는 말은 많지만 확실히 그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사회지도층이나 기업은 찾기가 쉽지 않다.
흔히 이스라엘의 농업혁명을 두고 창조경영의 모범사례로 많이 소개한다. 이스라엘은 물 부족 국가로서 국토의 60% 이상이 불모지 땅임에도 기존 농법을 탈피해 농업을 최첨단산업으로 성장시켰다. 특히 농업생산성의 가장 중요한 물 부족을 생활용수를 재활용해 물이 필요한 작물에 바로 물을 공급하는 신기술을 개발했다. 이스라엘은 고정관념을 탈피해 불모지 땅에서도 창조적 경영으로 충분히 농업을 최첨단 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러한 창조적 경영 사례를 멀리 있는 이스라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주 교동 최부잣집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경주 최부잣집은 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셋째 아들 최동량이 만석부자 터전을 이뤘다. 그는 경주에 이앙법을 처음 전파했으며 보와 도랑 신설 등 치수와 개간으로 농사기법을 발전시켰다. 그의 장남인 최국선은 선대의 농업장려를 계승해 버려진 땅을 더욱 많이 개간해 옥토를 늘려 재산을 크게 늘렸다.
당시에는 논에 직접 씨를 뿌려 벼를 재배하는 방식이었다. 최부잣집은 경주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모내기법인 이앙법을 도입해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이앙법이 보급되려면 먼저 수리시설이 잘 돼 있어야 한다. 이에 최부잣집은 보와 도랑신설 등 수리시설을 만들어 물을 저장해 이앙법으로 모내기할 수 있었다. 벼의 생산량 증가를 가져온 기술 혁신인 이앙법 시행 이후 최부잣집은 한해 몇 백석씩 불어나 만석꾼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최부잣집은 이앙법 외에도 우경법(소를 이용한 농사법)을 도입해 농지매입보다는 개간을 통해 농지를 늘렸다. 당시 조정은 양난 이후 식량증산 정책을 펴 개간을 적극적으로 권장해 개간자에게 3년간 세금을 면해주고 주인 없는 밭이나 새로 밭을 개간한 자에게는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최부잣집은 대규모 개간사업 외에 당시 지주에게 유리한 작개제(고율의 지세를 거두는 제도)를 버리고 병작반수제(수확의 절반을 나눠주는 제도)를 채택했다. 이에 ‘최부잣집이 논을 사면 소작인들이 박수 친다’고 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면서 유랑인들이 계속 모여들어 재산이 기하학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최부잣집은 권위의식을 버리고 노비들도 차별없이 대하면서 소작인들에게도 땅을 나눠줘 열심히 일한 노비는 그 성과를 가져갈 수 있게 해 노동의욕과 생산성을 높였다.
최부잣집이 현장경영을 몸소 실천한 점도 돋보인다. 최부잣집은 초기 양반들이 농사를 직접 짓지 않은 것과는 달리 농민과 함께 농사를 짓는 솔선수범의 자세를 보였다. 이같은 현장경영으로 소작지를 관리하는 마름 제도 철폐로 이어졌다. 당시 큰 부자들은 농토의 범위나 농작물 수확량이 많아 마름을 뒀다.
최부잣집은 마름과 소작인들 사이에 항상 말썽이 많고 마름의 횡포가 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마름 제도를 과감히 없앴다. 중간관리자를 없애는 대신 마름에 들어가는 비용은 소작인에게 돌려줬고 특히 소작인 중 병자가 있거나 사정이 어려운 집의 소작료를 깎아줘 소작인들이 농사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최국선은 궁중의 사옹원(조선시대 궁중의 음식을 맡아본 관청)에 근무할 때 술 빚는 법을 배워 집안에 전수해 당시 왕이 드시는 술 제조법을 사가에 전수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 술이 지금의 교동법주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명주로 자리잡았다.
최부잣집 마지막 만석부를 지키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최준은 경주 인근에서 가장 먼저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러한 선제적이고 실용적이며 창조경영을 펼쳤던 최부잣집이지만 소작인들에게 절대로 농사 연장은 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잣집은 사정이 어려운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돈이나 쌀을 빌려 주는 인심은 후했지만 농사 연장인 호미나 괭이, 낫 등을 빌리러 다니는 게으른 농사꾼은 절대 도와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돈은 딱히 있다가도 없어 아쉬울 때가 있지만 생명을 연장해갈 농기구를 농사꾼이 빌리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