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첫 지하철이 출발하기도 전 집을 나섰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서 서울역에 도착하니 이미 긴 줄이 서 있었다. 직원이 나눠준 종이에 한 자씩 정성껏 써내려간다. ‘출발역…행신, 도착역…동대구’ 설날은 한 달이나 남았지만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손녀는 엄마 손을 잡고 주단으로 향했다. 아이의 귀여운 재롱에 가게 안이 금방 웃음으로 번졌다. 색색의 치마, 저고리에 꼬까신과 노리개들까지. 아이는 그 화려함에 넋을 뺏겼고, 엄마는 너무 예쁜 딸의 모습에 맘을 빼앗겼다. 이 모습을 어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려야 할 텐데… 엄마의 마음은 어느새 친정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손주를 등에 업고 시장으로 향했다. 민어조기에 홍합 말린 것, 곤약도 한 덩이, 아들이 좋아하는 식혜 생각에 엿기름도 사고, 우는 손주 달래느라 풀빵도 한 봉지… 잡곡가게를 지나 생선가게, 야채가게, 과일가게를 들르니 손수레가 금방 가득 찼다. 그래 어서 집에 가자. 딸과 며느리 불러서 음식 장만 해야겠다.
방앗간은 찜질방마냥 김으로 가득 찼다. 주인은 아들, 딸에 손녀까지 모두 불러 쌀을 씻고, 찌고, 떡을 뽑고, 말려 썰었다. 한동네 넉넉히 다 먹일 가래떡들이 산처럼 쌓이다가도 썰기 무섭게 금세 바닥을 보였다. 허리 한 번 제대로 펴기 힘들고 담배 한 대 필 새 없지만 구성진 노랫가락이 절로 나온다. 빳빳한 새 돈들은 따로 모아서 손주들 세뱃돈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