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5월 31일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2002 한일 FIFA 월드컵 개막식 선언문을 낭독함과 동시에 세계 60억 인구의 이목이 한 달간 한일 양국에 집중됐다. 특히 월드컵 개최국인 한일 양국 국민은 매 경기마다 축구공 하나에 가슴 졸이며 울고 웃는 것은 물론,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축구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고 보면 스포츠 중에서도 특히 관중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데는 축구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상대팀을 적으로 간주해,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서 이기면 우월감에 빠지는 반면 패하면 상대팀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2013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벌어진 양국 관중의 ‘응원 보이콧’ 사건은 이같은 현상의 폐해를 크게 부각시켰다.
한일 양국은 지울 수 없는 과거사로 인해 상시 적개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관계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 팀을 응원한답시고 일제 강점기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휘두른 일본 응원단과 이에 자극받아 안중근 의사의 초상화로 관중석을 메운 우리 붉은악마의 행동은 가뜩이나 축구 경기로 예민해져 있는 서로의 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는 경기장에서의 정치적 메시지 전달과 응원을 금지시킨 국제축구연맹(FIFA)의 규정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흔히 축구 경기에서 관중은 ‘열두 번째 선수’로 불린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응원하며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는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과도한 감정이입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사람이다 보니 경기에 몰두하다 보면 감정이입을 억제하기란 쉽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축구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축구 종주국인 영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훌리건이다.
성숙한 사회의 국민이라면 적어도 사회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데가 없어서 축구장에서 난동이나 부리는 훌리건들과는 달라야 한다. 국가 간의 갈등을 신성한 그라운드로까지 옮겨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한일 양국은 2002년 FIFA 월드컵 공동 주최를 계기로 선수들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지난 6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장이 된 홍명보 감독과 은퇴한 안정환·유상철 선수 등이 J리그에서 활동했고, 지난달 27일 일본전에서 2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끈 지소연 선수도 현재 고베 아이낙에서 활약하고 있다.
‘열두 번째 선수’들의 역할은 분명하다. 그라운드에서만큼은 과거사를 배제하고 페어 플레이 정신에 입각해 팀을 응원하는 것이다.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임무를 망각하고 한국 선수들의 활약 무대를 좁히는 과오를 범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