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대회 13일)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김연아 (실제로는 금메달인) 은.’ 마치 패러디를 연상케 하는 이 문구는 공영방송 KBS의 2014 소치 올림픽 폐막식 방송 중 공개된 자막이다. KBS는 한국 선수의 메달 일지를 전하며 김연아의 은메달을 ‘실제로는 금메달’이라고 표현했다. SBS는 피겨 스케이팅 갈라쇼 영상을 전하며 ‘영상취재, 편집’ 자막을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얼굴에 배치, 그녀의 모습을 화면에서 가려버렸다.
올림픽은 끝이 났지만 국내 방송사의 ‘묻지마 애국주의’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 주인공은 ‘피겨퀸’ 김연아 선수. 지상파 방송 3사는 석연치 않은 심판판정으로 김연아의 은메달이 확정되자 이성을 잃었다. KBS 변성진 해설위원은 “어느 누가 러시아의 버프 점수를 이길 수 있겠나”며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선수생활을 하며 이번에 받은 금메달이 내 나라가 준 거품메달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일이 생기길 바란다”고 비난했다. SBS 배성재 아나운서는 “푸틴, 동네 운동회 할 거면 우릴 왜 초대한 거냐. 소치는 올림픽 역사의 수치”라는 글을 자신의 SNS에 남겼다.
이성적 비판이 아닌 조롱과 비난만이 난무했다. 맹목적인 애국심에 편승한 발언은 피겨스케이팅 점수표에 근거한 김연아와 소트니코바의 연기를 상세히 비교한 일부 언론의 냉철함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논점은 김연아와 소트니코바의 대결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경쟁이라는 불필요한 상황으로 확장됐다. 심판판정에 대한 냉정한 판단, 상황분석 대신 푸틴 대통령을 포함한 러시아 전체가 비난의 대상이 됐다. 불과 며칠 전 온 국민의 응원을 받았던 빅토르 안(안현수)도 한순간에 역적으로 몰렸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지난달 26일, 문화연대, 스포츠문화연구소 주최로 서강대에서 열린 ‘소치 동계올림픽으로 드러난 대한민국 체육계의 문제점’ 토론회에서 “언론과 해설위원은 과열된 애국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하고 국민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석연치 않은 심판판정에 대한 언론의 역할은 냉철한 분석 데이터를 제시해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지 유치한 장난으로 인한 무차별적인 인격 모독이 아니란 것이다. 특히 판정의 시비가 가려지기도 전에 감정적인 발언을 내뱉는 점이나 폐막식에서 해당 선수의 얼굴을 가리는 등 편집 영상을 통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은 올림픽에서 흘린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김연아는 은메달 수상 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만족한다”며 환하게 웃었고, 국민들은 ‘연아야 고마워’라며 박수를 보냈다. 스피드스케이팅의 이규혁 선수는 6번의 올림픽 동안 메달을 한 번도 따지 못했지만 대중의 찬사를 받으며 ‘스포츠 영웅’이 됐다. 납득할 수 없는 심판판정에 대한 비판, 그리고 메달이 아닌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꿰뚫어보는 국민성은 이미 성숙해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종합 4위를 차지한 대한민국에 대한 외신의 문제제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에 패한 이탈리아, 스페인 언론의 조롱 섞인 비난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그들만의 아우성으로 인식됐다. 방송사가 준 ‘실제로는 금메달’이란 타이틀에 대해 김연아 선수가 얼마나 마음의 위안을 얻을지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