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썽쟁이였던 동생에게는 더 자주 하셨다. 비단 어머니뿐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도 그랬다.
젊은 사람들이 싸움을 하거나 서리를 하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뭐가 되려고 그러누” 하시거나 “뭐에 써먹누”라는 말로 나무라곤 하셨다. 성장해 가면서 한때 “저걸 뭐에 써먹누”란 말은 내 입에도 붙었다. 꼭 어머니처럼 말하곤 했다.
추측컨대,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하고 순박했던 동네 어르신들이 사람을 부려 먹을 대상 정도로 생각했던 건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던 곤궁한 삶에서 연유한 게 아닌가 싶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불과 반세기 만의 변화와 성과를 우리는 기적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기적은 우리에게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를 선사했고, 문명의 발달은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 사고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지금은 누구도 자기 자식을 보고 써먹을 생각을 먼저 하지는 않는다. 자식이 크게 성공하기보다 그저 자기 삶을 실현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그로부터 생긴 삶의 여유가 가져다 준 변화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삶의 주체로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위대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와 문명의 진화가 사람에게 꼭 좋기만 하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대신 함으로써 일자리를 빼앗긴 채 아우성치는 모습이 그렇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특히 사납고 엄하다. 우선 자존심을 버리라고 훈계한다. 그리고 눈높이를 낮춰야 하고, 다음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새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라고 몰아붙인다. 간단히 말하면 써먹기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부려 먹을 대상으로 사람을 보는 태도, 예로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발상은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써먹겠다’는 발상에 불과한 얘기에도 굳이 합리적 설명을 붙여 가며 교묘한 수법으로 사람들을 농락한다. 이런 의도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곳이 대학과 미디어다.
써먹기 좋은 사람 만들기를 앞장서 실천해 가고 있는 몇몇 대학들과 암묵적으로 따라가는 대부분의 대학들에서 민주시민을 기르는 대학 본래의 기능은 어느덧 잠꼬대 같은 소리가 되고 말았다. 대학의 기능은 산업체가 요구하는 기능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뒤바뀌고 취업이 어렵거나 학생들의 지원이 적은 학과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폐과를 단행하기도 한다. 가히 만행이라 불러 마땅한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도 이에 대항하는 목소리는 그저 애처로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은 마침내 시민이 되기보다는 달인이 되어야 하는 정글이 되어 가고 있다.
티브이와 신문, 매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매체들 속에는 온갖 기묘한 달인들이 속속 등장한다. 오랫동안 습득한 동작이 마침내 기계보다도 빠르고 정확하다. 돈을 세는 사람, 음식을 만드는 사람, 접시를 나르는 사람, 밥상을 10개씩 들어 나르는 사람, 온갖 달인들의 세계가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 전파된다. 이런 달인들의 모습이 때로는 민망하고 때로는 구슬프기 짝이 없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세상이 슬프다. 최근 선거철이 도래하면서 도처에서 우후죽순 색다른 달인들이 출현하고 있다. 봉사의 달인도 나타나고 행정의 달인도 모습을 드러낸다. 글쎄올시다. 시시각각 변하는 게 사람이고 사회일진대 바로 그 사람과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행정에서 어떻게 하면 달인이 될 수 있다는 건지, 선뜻 헤아리기 쉽지 않다. 지극한 마음 씀씀이가 발현되어야 하는 봉사의 길에서 달인은 또 무엇인가.
공무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행정의 달인이라고 주장하는 모양새가 흡사 생각 없음을 드러내는 처사이거나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라는 고백은 아닐지, 마음 가꿀 새 없이 달려들어 봉사 실적을 쌓아올리는 모양새가 혹여 병은 아닐지, 바라보는 심사가 그저 편치만은 않다. 굳이 달인이어서 나쁠 이유는 없다. 자기 분야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아올린 성과를 굳이 깎아내릴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다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달인이기 이전에 자기 삶의 주체여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사람이 도구를 부려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은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