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미스 사이공’으로 데뷔… 레아 살롱가와 파트너 호흡 이력
뮤지컬을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무대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다. 그의 빛나는 존재감을. 이제는 한국 뮤지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마이클 리(40)다.
재미 교포 출신인 그는 199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 투이 역을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실력파다. 브로드웨이 출신 스타와 뮤지컬 ‘서편제’의 조합만으로도 특별한 이 만남은 대내외적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15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마이클 리는 서툰 한국말이지만, 차분한 가운데 현명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건넨 손을 웃으며 맞잡는 두 손에서 따스한 성품이 느껴졌다.
“제가 ‘서편제’ 무대에 서게 될 거라 생각 못했어요. 하지만 이지나 연출에게 하고 싶다는 의지를 계속 내비쳤었죠. ‘서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잖아요.”
고 이청준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서편제’(연출 이지나)는 팝, 록, 판소리가 한데 가미된 창작뮤지컬로, 올해 3번째 막을 올렸다. 영화 ‘서편제’는 물론, 초연 뮤지컬까지 챙겨봤다는 마이클 리는 “‘서편제’의 빅 팬(Big Fan)”임을 자처했다.
“‘서편제’가 동양적인 뮤지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어적 장벽만 있을 뿐, 줄거리와 구성은 외국인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좋아할만한 작품이에요. 무대 세트도 단순하지만 저는 그 점이 매력적입니다. 음악도 무척 좋고요.”
2014년 버전의 ‘서편제’는 작곡가 윤일상의 손을 거쳐 탄생된 추가곡으로서 동호의 캐릭터를 한층 부각시켰다. 여기에서 마이클 리는 ‘얼라이브(Alive)’ 록 스타일의 넘버는 물론, ‘스모크 겟츠 인 유어 아이즈(Smoke gets in your eyes)’ 등 올드 팝을 소화한다. 마이클 리의 서정적이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를 통해 작품 자체가 신선한 매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특히 순백의 옷를 입고 나타난 마이클 리가 신명나는 표정으로 북채를 잡고 유봉, 송화와 리듬에 빠져드는 모습은 관객을 한 마음으로 물들인다.
“‘서편제’란 작품은 마치 제게 음악을 향한 열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의사인) 제 아버지와 형제는 줄곧 제게 의사가 되라 말했지만, 제 온 심장은 예술, 뮤지컬을 향해 있었어요. (반대를 무릅쓰고) 꿈을 펼치려고 노력하는 동호의 모습은 참 저랑 닮았더라고요. 전 동호 역할을 무척 좋아한답니다.”
어떠한 타협에도 굴하지 않는 유봉이었다. 그러나 동호에게 가고자 하는 길과 반대되는 꾸짖음은 가혹한 채찍질일 뿐이었다. 자신만의 소리(대중가수)에 뜻을 품은 동호는 유봉과 갈등을 빚다 마음 속 한을 간직한 채 떠나고 만다. 실제로 스탠포드 의대에 입학해 프리 메디(Pre-Medi) 과정에 임하던 도중, 뮤지컬에 매료돼 뛰어든 마이클 리의 궤적을 고스란히 연상시킨다.
“‘트윙키’, ‘바나나’라고 불렸어요. 같은 아시아인 친구들에게.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한국인인데도 한국말을 못 한다고 말이죠. 제가 자라난 곳은 아시아인이 한 명도 없었고, 아버지도 1971년도에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아예 정착해 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게끔 가르치셨죠.”
쉽지 않은 시선을 맞닥뜨렸다. 그럼에도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계로 뛰어든 그는 전설적인 뮤지컬 스타 레아 살롱가와 파트너 호흡을 맞추는 등 제한적인 인종적 입지에도 불구하고, 활약을 펼쳐나갔다. 어느새 올해로 약 20년의 무대 인생을 맞이한 그가 한국에 정착한 것은 불과 1년 전. 크게는 국내 무대, 작게는 눈 앞에 ‘서편제’까지 마이클 리에게는 큰 도전이다. 특히 ‘서편제’를 통해 국내에선 처음으로 대사가 있는 뮤지컬에 도전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지저스, ‘노트르담 드 파리’ 그랭구아르, ‘벽을 뚫는 남자’의 타이틀롤인 듀티율 역을 통해 송스루(Song-throughㆍ대사가 멜로디로만 진행되는 장르) 뮤지컬 무대에만 섰던 마이클 리였다.
“(송스루에 비해) 대사는 영어라도 어렵죠. 송스루 장르는 대사나 연기를 할 때도 멜로디를 잘 따라가면 되거든요. 사실 (한국말 대사가 어색하다는 평가는) 예상했습니다. 최선을 다했던 부분이에요. 공연장을 직접 찾은 분들이 해주시는 말이기 때문에 관심에 크게 감사한 마음이 든답니다. 물론 도전은 즐겁지 않죠. 하지만 도전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요소고, 도전할 수 있을 때 만족감이 더 큽니다. 비록 도전은 어렵지만, 너무 쉬우면 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모든 작품이 저를 성장시켰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족 한 적이 없다’는 마이클 리는 빼어난 실력이 도드라질 때까지, 노력할 뿐이다. 지인들은 완벽주의라 입을 모은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에서 더블 캐스트로 섰던 김동완도 경탄할 정도로 한국어 대본을 해석해 영어로 옮기고, 다시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옮겨 외우는 그의 노력은 여전했다.
“그렇게 하면 대사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분석하게 되고 집중할 수 있게 돼 좋은 점이 많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캐릭터에 접근할 때) 본능이 항상 우선입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걸 분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칫 배우들은 캐릭터에 몰입하다보면 실제 자기 자신과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 선을 분명히 구분해야 해요. 그 일치감이 무서우면서도 희열로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죠.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욱 필요한 순간입니다.”
긍정적인 태도를 부모님에게 물려받아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는 마이클 리. 이는 그를 지탱케 하는 큰 힘이다. 특히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발현되는 그의 긍정적인 내면은 등장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미소를 자아낸다. 이는 그만의 낭중지추(囊中之錐)와 같은 빼어남과 더불어 시너지로 발휘한다.
“1995년 (브로드웨이) ‘미스 사이공’이란 작품을 무척 즐겁게 했고, 2년 동안 끝까지 공연했었죠. 그리고 결혼을 하고 15년 후에 다시 그 작품을 했을 땐, 정말 행복했어요. 2006년 국내 초연 ‘미스 사이공’에서 크리스 역할을 했다가, 첫 아이를 갖고 2010년에 또 했었거든요. 남다른 기분이었죠. 서울공연을 마치고 지금 지방에서 하고 있는 ‘벽을 뚫는 남자’라는 작품도 10년 후에 다시 할 수 있으면 좋겠고요. 배우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자신이 겪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같은 작품, 같은 캐릭터에 녹여낼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루한 사람은 절대 좋은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5살, 2살이라는) ‘두 아들이 나보다 한국어를 더 잘 해요’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활짝 웃는 그에게 완벽한 한국말 대사 연기를 하게 될 날을 성급하게 채찍질할 필요가 있을까. 한층 깊어진 ‘서편제’ 속 또 다른 동호를 연기하는 마이클 리를 보게 될 날이 멀지 않을 테니. 당장 오늘을 기대하게 만드는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