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저녁, 온종일 비가 내려 질펀한 길 위로 표정 없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장내에서도 장외에서도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터져나오는 울음마저 속으로 삼켜야 했던 침울한 분위기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동료 한 사람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 말문을 열었다.
“안산시 고잔동은 고요합니다. 진한 향내음과 어여쁜 영정을 둘러싼 국화꽃 향이 그저 저의 영혼에게 이야기합니다. 잊지 말라고. 이전의 많은 일들은 잊었더라도, 이번만은 꼭 기억하라고. 수면에서 사라진 세월호의 마지막 잔상을, 그 많은 우리 아이들을 품고 가라앉은 그 순간을, ‘살려 주세요’라고 외쳤던 그 목소리를.”
엊그제 그 시간, 다만 처연해 보였던 사람들의 오랜 침묵에서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어떤 공포감 같은 게 느껴졌다.
오늘에서야 그게 스스로를 향한 공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잊을까봐, 시간 지나면 이번에도 또 잊을까봐, 스스로를 단속하고 검열하는 단계로 상황은 진전하고 있다. 스스로를 향해 고삐를 당기는 팽팽한 긴장이 세상을 가득 메워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만났던 한 시민운동가의 자괴감 짙은 소회 앞에서 나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2008년 혜진이, 예슬이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마을이 있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안양에서 마을 만들기 사업은 혜진이, 예슬이 사건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게 시작한 운동이었는데 지금 마을 만들기의 성과로 남은 것은 오직 CCTV뿐이에요.”
마을 만들기 운동의 참뜻이 이런 것이었구나. 마을 만들기라면 그동안 흔히 했던 버릇처럼 책 몇 권쯤 읽었다. 현장에도 몇 군데 다녀보고, 강의도 더러 들었더랬다. 부끄럽지만 어떤 모임에 가서는 ‘마을 만들기가 답인지 확신이 없다’고 용감하게 지껄여댄 적도 있다.
정작 이날 마을 만들기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과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했다. 마을 만들기가 되었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우리는 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돈이 그 어떤 종교보다도 강력한 신앙이 된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는 보잘것없게 마련이다. 생명의 가치는 돈 아래 있고, 돈을 위해서라면 편법도 쉽게 용인될 수밖에 없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편법이라도 상관없을 만큼 우리 가슴은 이미 무딜 대로 무디어졌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대한민국 역대 정부는 오로지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역설했다. 정부의 주장 앞에서 우리는 늘 변변치 못했다.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왔다.
급기야 세월호를 통해 우리의 민낯을, 천박한 삶의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같은 말을 반복해 무엇 하랴. ‘뿌리부터 가지까지 몽땅 썩어빠진 국가’ 실체를 넋 놓고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아직도 차디찬 바다 속에는 건져내지 못한 인명들이 남아 있다. 이렇게 무기력한 시간들이 다시 진실을 가리고 있다. 도대체 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가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내 기억은 다시 천안함 사건 때의 한순간에 가 닿는다. 사건이 나고 보름 뒤,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군에 입대했다. 입대 전날 저녁만이라도 함께하자며 들어가던 차 안에서 복잡한 감정과 씨름해야 했다. 도대체 이걸 국가라고! 승복하기 어려웠다. 국민 앞에 당당히 사건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이런 국가를 믿고 아이를 군대에 보내야 하는지 고통스러웠다.
며칠 전 유가족 한 분의 인터뷰를 접했을 때도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삼풍 때 화만 내고 아무것도 안 했더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오늘 딸이 저 깊은 바다 속에 있다.” 지금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도대체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