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화 한국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창조경제 구현의 핵심은 제2의 벤처붐이다. 이를 위해 최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할 정책은 1차 벤처붐을 이룩했던 벤처 생태계의 복원이다. 1995년 12월 벤처기업협회가 출범하면서 주도했던 제1차 벤처 붐은 자금 지원이 아니라 제도 혁신으로 이뤄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1차 벤처 붐의 기회가 유선인터넷이라면, 2차 붐은 무선인터넷이라는 것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2000년 한국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잉태했다. 미국이 아닌 국가에서 불과 5년 만에 벤처 생태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벤처기업협회가 주도해 만든 세계 최초의 벤처 기업특별법과 세계 두 번째의 금융 신시장인 코스닥이 견인차였다. 2000년 한·이스라엘 벤처 포럼에서 이스라엘의 벤처기업가들은 한국의 벤처기업특별법과 코스닥을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지금도 한국의 벤처 총 매출액은 이스라엘의 GDP를 능가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한국과 이스라엘의 벤처 생태계는 엄청난 격차로 한국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이 잉태했던 놀라운 벤처의 성과는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2차 벤처 붐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차 벤처붐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선행돼야 한다.
2001년 전 세계 IT 버블이 붕괴했다. 미국의 나스닥과 함께 한국의 코스닥도 동반 폭락했다. 이는 전 세계적 신경제 붕괴 현상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묻지마 투자’, ‘무늬만 벤처’ 등의 속죄양을 찾아내 소위 ‘벤처 건전화 정책’이라는 벤처 규제 정책들을 쏟아 낸 것이다. 그 대표적 정책이 △코스닥과 코스피의 합병 △벤처 인증제의 보수화 △주식 옵션제의 보수화 △기술거래소 통폐합이다. 이들 벤처의 손발을 묶는 4대 규제 정책의 결과, 나스닥이 원상 회복하는 동안 코스닥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은 세계적 미래 학자 피터 드러커 교수가 인정한 세계 최고의 기업가 정신 국가에서 OECD 국가 중 최악의 기업가정신을 가진 국가로 전락했다.
벤처 빙하기 속에서도 2001년 이전 창업한 벤처들은 굳건히 성장했다. 3만여개 벤처의 총매출액은 삼성전자보다 많은 280조원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벤처의 더욱 중요한 점은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성과다. 벤처기업 실태 조사에 의하면 연평균 15% 이상 성장하고 있어 경제성장 기여도가 한국 경제성장의 3분의 1인 1.2% 수준이다. 성장과 고용의 유일한 견인차인 벤처는 거품이 아니라 기적이었던 것이다.
코스닥은 벤처 투자와 회수의 선순환 고리다. 코스닥 상장 규모가 연간 180여개에서 40여개로 줄고, 상장소요 기간이 7년에서 14년으로 늘어나면서 코스닥은 급성장한 벤처 생태계의 회수시장 역할을 상실하게 됐다. 코스닥의 활성화 없는 벤처 활성화는 본원적으로 불가능하다. 코스닥 문제의 핵심은 시장 운영 철학을 뒷받침하는 지배구조의 문제다. 인적 쇄신이 중요한 이유다.
벤처 인증제는 ‘무늬만 벤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망하지 않을 기업을 선정하는 기준인 융자 심사 위주로 전환됐다. 융자 보증은 벤처가 가진 ‘고위험·고수익’과 반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초기 기술 벤처들의 벤처 인증이 어려워지면서 초기 벤처 지원을 위한 세계 최초의 벤처기업특별법의 의미가 퇴색해 버린 것이다. 연구개발 위주의 인증제도를 중심으로 비기술벤처를 다양하게 인증하는 초기 벤처 인증제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
주식 옵션은 벤처기업에 인재 유입의 유일한 대안이다. 실리콘밸리의 인재가 벤처로 가는 이유다. 그런데 주식옵션과 시가의 차액을 기업의 손실로 반영하는 회계기준이 시행되면서 주식 옵션 제도는 인재 유입의 역할을 상실하게 됐다. 주식 옵션에 대한 국제회계기준(IFRS)에서도 이를 허용하는 대안들이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정책 당국의 의지다.
기술거래소는 벤처의 기술사업화 결과를 대기업에 연결하는 연결고리다. 기술의 가치는 정부기관의 평가가 아니라 시장에서 형성된다는 것이 행동경제학의 결론이다. IP와 M&A의 거래 플랫폼이 될 민간 주도의 새로운 기술 거래 시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2 벤처붐의 전제조건은 벤처기업협회가 주도했던 초기 벤처 생태계의 복원이다. 이를 이룬 이후에 자금 지원 정책 등을 펴는 것이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