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교수)
한국뮤지컬이 삭발할 때[정론]
-이유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교수
2000년대를 눈앞에 둔 세기말인 1999년, 한국의 영화인 100여명이 삭발을 한 채 한국 영화 의무 상영일이 축소되는 것을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영화인들에게 삭발이란 영혼을 잃는 결행이었을 것이다. 외모 자체가 존재 증명이고 상품 가치인 그들이 그 존재를 바치며 거리에 나앉았고 한국 영화를 지키겠다고 외쳤다. 당시는 수입 영화가 한국 영화 시장을 80%가량 점유하던 시절이었고 제도적일지라도 한국 영화의 비중을 사수하고 늘리는 건 모든 영화인의 생존 문제였을 거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영화시장은 수입 영화의 비중이 20%에 불과한 역전 상황이 되었다.
최근 한국 뮤지컬시장은 줄초상 분위기다. 메이저 제작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공연을 앞두고 대관료까지 지불한 대형 뮤지컬들이 제작비 문제와 흥행에 대한 불안감으로 연쇄적으로 공연을 취소한다. 최근 몇 년 갑자기 늘어난 공연 수가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을 감당하지 못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점점 심해지고 제작사들은 제살 깎기 등 무모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뮤지컬 전문 창작인력(작가, 작곡가, 연출, 음악감독, 안무감독, 디자이너)과 전문업체는 여전히 부족하고 공연마다 베테랑 전문가를 찾다 보니 극소수의 특정 인력에게 개런티와 작업이 몰려 공연의 완성도에 악영향을 미치고 특정 스태프 개런티는 상승해 제작비 압박도 점점 심해진다. 설상가상으로 어느새 스타가 공연의 흥행을 결정하는 배우 중심의 시장이 되다 보니 프로듀서들은 공연 잘 만드는 일보다 스타 캐스팅 잘 하는 것이 능력이고 특정 스타 개런티도 기하급수적으로 치솟고 있다. 그리고 그 뒷감당을 관객이 하는 형국인 것이 비싼 공연 입장료는 요지부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제작자의 궁여지책은 흥행이 보장되는 해외 유명 대형 공연을 라이선스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한국 뮤지컬시장은 여전히 수입 라이선스 뮤지컬이 시장 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 관객들이 지불한 티켓 가격 중의 많은 비중을 외국에 비싼 로열티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꼬리는 한국 뮤지컬 창작자들에게 성장할 수 있는 작업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귀결된다. 창작뮤지컬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는 풍토인 것이다.
얼마 전, 설도윤 한국뮤지컬협회장이 티켓 통합 전산망의 현실화를 외쳤다. 이 통합전산망 시스템은 사실 2007년부터 문화부가 직접 연구한 한국뮤지컬 활성화 방안에서도 거론되었고 당시 그 연구의 TF팀장을 맡았던 나는 영화 전문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한국 뮤지컬시장의 현안이었다.
한국뮤지컬이 진정하게 산업화되고 시장이 커지려면 시장의 투명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 기반이 영화진흥위원회까지 만든 정부의 과감한 육성책이었듯 지금 한국 뮤지컬산업 또한 정부 차원의 보모가 필요한 걸음마 단계이고 어떤 공적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그 시장을 분석할 수 있는 통계가 바탕이 되는 것인데 우리 뮤지컬시장은 산업화는 외치지만 여전히 원초적 의식과 방식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뮤지컬산업의 미래를 밝게 하는 단서들이 이어진다.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뮤지컬 강국, 창작뮤지컬 제작능력이 뛰어난 나라, 차세대 한류 콘텐츠 등 좁은 내수시장을 넘어 세계로 진출해 경쟁할 수 있는 저력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지금 한국 뮤지컬시장의 이 악순환도 과도기적 자체 구조조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고비를 정면 돌파하면 투명하고 안정적인 산업화의 길에 들어서 있으리라고 희망적 위로도 스스로 해 본다. 절묘하게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 구도를 따르고 있는 한국 뮤지컬산업의 행보를 보면 10년 뒤에는 한국 뮤지컬산업도 창작뮤지컬이 전체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역전 상황이 되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의 편이다. 10년 전 한국 영화는 삭발했다. 거리로 나서 한국 영화인들의 위기를 한목소리로 외쳤다. 스스로를 구하는 절박한 생존 전략을 위해 영화계 전체가 연대했다. 지금 한국 뮤지컬도 다함께 삭발이라도 해야 할 때다. 영화인들이 그랬듯 유명 스타부터 일단 시장을 살려야 나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심정으로 나서 줘야 한다. 한국 영화가 영화인들의 절박한 생존 투쟁을 전후해 그 시장의 운명이 결정되었듯 한국 뮤지컬도 지금 운명적 갈림길에 서 있다. 그리고 희망적 미래의 단서들을 지니고 있다. 미래 또한 우리 뮤지컬 종사자들 스스로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