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년 한국여성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사극의 꽃은 왕비이다. 화려한 옷차림은 물론이고, 궁중 내 여성들 간의 암투와 권력 투쟁은 극을 더 재미있게 만든다. 그런데 대체로 왕비는 항상 인자하고 후덕하며 우아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반면, 후궁은 표독하고, 남을 모해하고, 권력 지향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왜 그럴까, 부덕(婦德)을 강조하는 유교적 이념 때문이다.
궁궐에는 왕비 외에도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 세자빈, 후궁, 공주, 옹주 등 많은 왕실여성들이 살았다. 왕비는 왕의 처이며, 국모로 불렸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왕이 되면 왕의 어머니로서 대비가 되고 할머니가 되면 대왕대비가 되었다. 빈(嬪)은 세자의 적실인 왕세자빈과 왕의 최고 후궁에 사용한다. 조선시대 왕비나 대비, 후궁은 모두 임금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구중궁궐의 외로운 여인들이다.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왕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조선왕비, 25개 가문에서 배출
조선의 왕비는 어느 가문 출신인가? 조선 시대 왕비는 폐위된 왕인 연산군, 광해군과 사후 추존된 왕인 덕종, 진종의 왕비와 폐비까지 모두 합하면 47명이었다. 왕비는 모두 25개나 되는 많은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청주 한씨가 5명의 왕비를 배출했고, 여흥 민씨와 파평 윤씨가 각각 4명을, 그 외 안동 김씨, 청송 심씨, 경주 김씨가 각각 3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이런 가문의 여성들은 조선에서 가장 큰 행사인 국왕 또는 왕세자와의 혼례를 통해 왕비가 되었다. 왕실의 혼례를 가례(嘉禮)라 하였다. 왕비는 왕실 어른들이 직접 보고 선발하는 간택과정을 거쳐, 혼례의 본행사인 여섯 가지 예식 즉 육례(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를 통해 왕비가 되었다. 세자빈은 후에 남편이 왕이 되면 왕비로 책봉 받았다.
편하지만 않은 왕비의 삶,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잡기도
조선의 왕비는 간택에서부터 잠자는 곳, 옷 입고, 먹는 것 등등 모든 부분에서 궁궐의 엄격한 예의와 법도를 따라야 했다. 궁중 생활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인내가 필요했다. 외척을 척결한다고 하여 친정 집안이 화를 당하기도 하였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한 삶을 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성종대 폐비 윤씨와 숙종 때의 인현왕후 민비와 희빈 장씨를 들 수 있다.
왕비 중 여러 어려움을 견디고, 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왕이 죽은 후, 즉위하는 왕이 어린 경우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대왕)대비는 왕을 지명하고, 국왕과 함께 국가의 일을 처리했다. 왕은 상소나 장계를 직접 보고 받지만 (대왕)대비에게 알리고 논의했다. 역모나 군사적인 일, 그리고 국정 운영의 중요한 일을 (대왕)대비가 담당했다. 조선에서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것은 성종 대였다. 성종은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세조비)의 지명으로 13세에 왕이 되었다. 이후 6명의 대비가 7차례 수렴청정을 통해 어린 왕을 보좌하며 조선을 이끌어 갔다.
제7강=조선 왕실 여성이야기(한희숙, 숙명여대), 자료제공=(사)역사․여성․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