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아픔 딛고 중국 발전 기틀 다져…상하이방 만들어ㆍ부정부패 조성 비난도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중국 외교소식통들은 7일(현지시간) 장 전 주석이 오전 10시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하루나 이틀 뒤에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등 중국 관영 언론매체들은 장 전 주석 사망설에 대해 아직까지는 별다른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3세대 지도자인 장쩌민은 개혁개방 체계를 완성해 지금 중국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그는 1926년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나 상하이교통대학에 재학 중인 1946년 공산당에 가입했고 학생 당원 중 핵심인물로 두각을 나타냈다.
장쩌민은 1955년 구소련 모스크바의 스탈린자동차공장에서 1년간 유학한 뒤 귀국해 창춘의 제1자동차 공장 엔지니어와 국무원 기계공업부와 전자공업부 부장을 역임했다.
지난 1966년 문화대혁명은 장쩌민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당과 공직에서 쫓겨나 10년 동안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 했던 것. 장쩌민이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85년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에서 시장을 맡으면서부터다. 상하이를 중국 최고의 경제와 금융중심지로 키우면서 덩샤오핑의 격려를 받게 된다.
지난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정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상하이에서 학생 시위를 조기에 진압해 덩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공산당 최고 서열인 총서기에 올랐다.
장 전 주석은 총서기에 오르면서 경제발전을 중시하고 개방정책을 적극 옹호하는 상하이 출신 인사들을 대거 기용한다. 중국 3대 정치 계파 중 하나인 상하이방이 만들어진 것이다.
장쩌민은 지난 1993년 3월 국가주석에 오르면서 덩샤오핑으로부터 권력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그는 톈안먼 사태 이후 국제사회의 외면과 중국인들의 좌절을 딛고 중국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사회 안정 속에 기업과 중산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쳐 고속성장을 이뤘고 지난 1999년 서부대개발을 제안해 낙후된 중국 내륙지방의 성장을 촉진했다.
장쩌민은 공산당은 지식인과 자본가, 인민 등 3대 세력의 근본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3개 대표론'을 주창해 기업인과 중산층을 공산당에 편입시켰다. 지난 2004년 9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에서 사임해 권력 전면에서 완전히 퇴장한 후에도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쩌민은 공산당 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의 후원자도 자처해 시진핑의 권력 장악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시 주석이 본격으로 반부정부패 드라이브를 걸면서 갈등을 빚어왔다는 평가다. 그의 측근이던 저우융캉 전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원회 서기는 권력남용 등 비리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