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놀랍다. 높은 투표율과 높은 반대표 비율도 그렇지만 이 모든 과정을 주민들이 관리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놀랍다. 720명의 자원봉사자가 선거를 관리했고 그 바람에 돈도 1억원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통상 드는 비용의 4분의 1, 그것도 일부 외부에서 온 찬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주민들이 부담했다.
대단하다. 원전 문제가 대단한지, 아니면 주민들이 대단한지, 아무튼 대단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중앙정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전 유치는 국가 사무라 주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법적 구속력이 없고 어쩌고 하고 있다.
맞다. 현행법상 국가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 원전 건설은 명백한 국가 사무이다. 그래서 법률적으로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 그 결과로 중앙정부를 구속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다. 행정 각부 장관 등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주민의 ‘의견을 듣고 싶어’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요구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투표 결과가 중앙정부를 구속하지 못한다. 투표 그 자체가 단지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삼척시의 주민투표는 아무것도 아니다. 법에 의해 실시된 것도 아니고 그 결과의 법적 구속력도 없다. 그래서 시장이 실시를 공표하지도, 실시의 주체가 되지도 못했다. 법에 따라 하는 투표였다면 그 관리도 삼척시 선거관리위원회가 해야 하지만 이 또한 그렇지 않았다. 주민들이 투표관리위원회를 만들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중앙정부가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나. 하다못해 주민들의 집합적인 의견이니 깊이 고민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나. 꼭 그렇게 국가 사무 운운하며 방어적이다 못해 궁색한 모습을 보여야 하나. 언제는 국가 사무면 뭐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나.
새삼 2003년 주민투표법 제정을 논의할 당시의 상황이 떠오른다. 지방자치법에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둔 것이 1994년, 그러니까 10년간 이를 실시하기 위한 주민투표법이 제정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머리 아픈 문제였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뚜껑을 열자 또다시 야단이었다. 어떤 범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절차로 할 것이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중앙과 지방의 입장이 다르고, 여야 정당과 시민사회의 입장이 달랐다. 그 사이에 제도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끼어들기도 했다.
정말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결국 오세훈 시장을 물러나게 한 투표확정 요건, 즉 투표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해야 투표가 성립한다는 내용 등 많은 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 사무에 대한 주민투표 여부 역시 그중 하나였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
할 수 있게 하느냐 마느냐, 구속력을 갖게 하느냐 마느냐. 결국 지금의 규정 그대로 보수적인 결정이 났다.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의견을 구하기 위해 요구해 올 때만 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이기주의적 성향의 주민투표가 난무할까 봐, 또 그 결과 주민투표와 주민참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화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자신은 없다. 즉 다 풀어도 괜찮을 것이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이번의 경우처럼 충분히 이해되는 일에 대해 중앙정부가 지금과 같이 방어적이고 궁색한 태도를 보인다면 주민투표법 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이다.
법의 취지를 잘 살펴봐 주었으면 한다. 법에 입각한 주민투표가 아니면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법은 가려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면 그야말로 반법률적 태도가 된다.
잘 생각해 잘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국가 에너지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는 기회로도 삼아주었으면 한다. 법은 그러라고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