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손가락이 오므라드는 현대판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리얼리티를 살린 아주 느린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비포 선라이즈'는 헨리 퍼셀의 음악으로 시작된다. 스콜라스바로크 앙상블이 연주하는 'Dido and Aeneas Overture'의 하프시코드 소리는 달리는 유레일 기차와 스쳐가는 유럽의 풍광을 더욱 고풍스럽게 만든다. 주인공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처음 만난 곳은 바로 그 기차 안이다. 기차 안에서 그들은 끝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오버숄더로 이어지는 이들의 대화 뒤로 강과 철제 다리, 농가와 밭이 쉴 틈 없이 지나가고, 가족과 인생, 가치관과 죽음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차창 밖 풍경처럼 휙휙 지나간다.
이야기를 잠깐 마치고 이들이 손을 잡고 내린 곳은 오스트리아의 빈이다. 이때부터 걷고 말하는 것이 전부인 일명 '워키 토키' 영화가 시작된다. 해가 뜨기 전까지 진행되는 이 장황한 로맨스는 오직 대화로 시작해 대화로 끝나니 대단한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은 음악은 캐스 블룸의 'Come Here'다. 음악감상실에서 흘러나오는 'Come Here'은 작은 공간을 꽉 메우다 못해 거리로 뛰쳐나와서 마리아테레지아 박물관과 오줌싸는 분수대, 조각상, 트램과 교차로에 온통 음악의 세례를 뿌려댄다.
기본적으로 '비포 선라이즈'에는 음악을 직접 삽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신 필요한 음악은 영화적 장치에 의해 레스토랑이나 클럽 연주자들의 연주로, 바의 배경음악으로 혹은 창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하프 오르간 소리 같은 현장음으로 대신한다. 바흐나 베토벤의 웅장한 클래식부터 라우드나 하랄트의 시끌벅적한 밴드곡들은 비엔나의 공원과 가게 골목 곳곳에 포진해있다가 주인공들의 발걸음과 대화에 맞춰 멋들어지게 등장한다.
'비포 선라이즈'는 제목 그대로 해가 뜨기 전까지의 사랑을 그린다. 시간적 제약 때문일까, 에단 호크의 대사대로 끝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 시인은 이런 '비포 선라이즈'를 설명하는 기막힌 즉흥시를 남긴다. "고향을 모르듯 목적지를 알지 못해요. 삶에 머물며 강물에 떠가는 나뭇가지처럼 흘러가다 현재에 걸린 우리. 그대는 나를, 나는 그대를 이끄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주인공 에단 호크, 줄리 델피는 총 18년에 걸쳐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완성한다. 그런 점에서 '비포' 시리즈는 타임머신 같은 영화다. 함께 늙어가며 과거를 기억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특별한 행운이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1995년 '비포 선라이즈'에 이어 2004년 '비포 선셋'을 통해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만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사랑받은 음악이 'Come Here'이었다면 '비포 선셋'에서 가장 사랑받은 음악은 'Waltz For A Night'이다. 특히 줄리 델피는 영화 말미에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Waltz For A Night'를 부르며 그동안 갈고 닦은 통기타와 노래 실력을 뽐낸다. 노래에서 흘러넘치는 매력은 덤이다.
'비포 선셋'을 찍고 줄리 델피는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런 영화에는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시선이 녹아 있게 마련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찍을 때 나는 20대였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믿었다. '비포 선셋'을 찍을 때쯤 나는 더 현실적이 되었다. 이젠 순수한 로맨티시즘보다는 관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비포 선셋'의 엔딩은 '비포 선라이즈'의 'Kiss And Say Goodbye'처럼 호들갑 떨지 않는다. 줄리 델피는 니나 시몬의 흉내를 내며 "이봐,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게 될 지도 모른다구" 장난스레 묻고, 에단 호크는 "나도 알아"라고 덤덤히 답한다. 때마침 니나 시몬의 'Just Time'이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 바로 그 시간에 당신은 나를 발견했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 내 시간은 거의 다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