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사람들은 통상 정관계, 산업계 인사들처럼 적극적으로 인맥을 관리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은 나라마다 한 개씩만 있다는 태생적인 면과 함께 업무 성격도 조사·연구 등 폐쇄적인 성향을 띠는 것이 배경으로 풀이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다른 중앙은행 사람들처럼 화려한 인맥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 총재는 또 지역적으로는 사실상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강원도 출신이다. 또 서울대 경제학과가 주류인 한은에서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의 학력도 크게 비빌 수 있는 ‘언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총재는 비교적 다른 한은맨들과 달리 중역을 맡았을 때부터 정관계 인맥을 적극적으로 관리했다는 전언이다. 한 한은 직원은 “한은 재임기간 때는 물론 퇴임 후 2년간의 야인 생활 때도 정관계 인사들의 경조사를 적극적으로 챙기는 등 다른 한은 임직원들과 달리 인맥을 잘 관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뒷배’ 없는 이 총재가 내부에서 인정받은 실력과 덕망 외에 이러한 인맥관리가 총재로까지 올라가는 데 일조했다는 해석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 총재의 국내 인맥은 ‘연세대’라는 씨줄과 ‘강원도’라는 날줄로 촘촘히 엮어 있다. 대외적으로는 국제기구 인사들, 각국의 총재들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견고히 짰다.
◇재정·통화·금융 정책 연세대 상대 출신이 점령 = 잘 알려졌다시피 이 총재(70학번)는 최경환 경제부총리(75학번), 임종룡 금융위원장(78학번)과 연세대 상대 동문이다. 기획재정부-한은-금융위가 “한통속처럼 굴러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책공조가 긴밀하게 이뤄지는 데는 이들 경제정책 수장이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특히 임 위원장이 기재부 1차관(2010년 4월~2011년 8월)이었을 때 이 총재는 부총재(2009년 4월~2012년 4월)로 함께 각종 회의에서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어 친밀하게 느낀다고 한다. 반면 최 부총리와는 총재로 취임한 후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총재로 취임한 초기에 최 부총리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묻는 말에 “최 부총리가 기재위원으로 활동할 때 제가 부총재보, 부총재로 집행간부였지만 국회 업무보고 하러 가서 그냥 먼발치에서 본 그 이상의 관계가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총재는 산업계 쪽에서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63학번)과 개인적으로 식사를 할 정도로 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현재 연세대 총동문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고위직 드물지만 결속력 강한 ‘강원인맥’ = 원주 출신인 이 총재는 평소 강원 출신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고향이 강원도 춘천 출신이며 연세대를 나온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이 총재는 최근까지도 매우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
실제로 한 전 총리는 지난달 12일 열린 한은 창립 65주년 기념행사에서 총 4명의 기조연설자 중 제일 먼저 연설하도록 배치됐다. 한 전 총리의 경력을 보면 한은과 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해 그의 기조연설은 생뚱맞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 총재가 한 전 국무총리와 친한 것이 배경일 것이라고 한은 사람들은 해석했다.
이번 65주년 행사에서는 강원도 강릉 출신인 조순 전 한은 총재도 기조연설자로 나와 눈길을 끌었다. 강원도민중앙회는 지난해 12월 이 총재에게 자랑스러운 강원인상을 수여했으며 조순 전 총재도 같은 상을 1997년도에 받은 바 있다.
강릉 출신인 권오규 전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와도 이 총재는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학사서 맺은 인연 이어가 = 특히 이 총재는 강원학사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강원학사는 강원인재육성재단이 강원도 출신의 우수 대학생을 위해 1975년 서울 신림동에 설립한 기숙사다.
강원인재육성재단 관계자는 “이 총재님이 최근에는 바쁘셔서 저희 강원학사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화환을 보내주셨다”며 “이전에는 자주 참석하셨다”고 말했다.
또 이 총재의 인터뷰가 지난해 6월에 발간된 강원인재육성재단 뉴스레터에 실리기도 했다. 보통 총재들은 사설 기관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데 이 총재가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다는 전언이다. 그가 특별한 애정을 쏟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총재는 강원인재육성재단과의 인터뷰에서 한은 입행을 원하는 강원학사생들에게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또 “총재 취임에 강원도 출신이라는 점이 어떤 영향을 줬나”라는 질문에 “대학과 직장에서 동향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라고 말문을 열고서는 “강원도 출신이라는 점이 지연에 따른 특별한 혜택을 주지는 못했지만, 강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지역적 색깔이 없어 인사에서 역차별 받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유로운 장점이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1976년 1년간 강원학사에 머무는 동안 최석영 제네바국제기구대표부 대사와 함께 생활했다. 최 대사는 지난해 3월 세계무역기구(WTO) 서비스무역이사회 의장에 선출되는 등 세계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인물이다.
이 총재와 같은 시기 강원학사에서 동숙한 인물로는 홍성한 BC월드제약 대표, 신승호 강원대 총장 등도 있다.
이 총재는 또 강원도 태백 출신이자 강원학사에 머물렀던 이종화 고려대 교수와도 친분이 매우 두텁다. 이 교수가 한은이 주최하는 국제콘퍼런스, 경제동향간담회 등에 자주 초청받는 것은 이런 배경도 작용했다. 이 교수는 또 중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금융기구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부총재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화제의 인물이며,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 대통령 국제경제 보좌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이창용과는 같은 종친… 구로다 총재와 ‘케미’ 뽐내 =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앙은행 총재로서 이 총재는 국제 인맥도 탄탄하다.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과는 같은 덕수 이(李)씨로 종친이다. 이 총재는 IMF 연차총회가 열릴 때마다 이 국장과 만나 세계경제에 대해 긴밀히 얘기를 나눈다고 한다.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수석이코노미스트와도 친하다. 이 총재는 지난 4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 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는데,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따로 시간을 내 신 수석이코노미스트와 점심을 했다.
이 총재는 후루사와 미쓰히로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와 윌리엄 화이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개발검토위원회 위원과도 가깝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 둘은 지난달 열린 한은 국제콘퍼런스에 초청돼 기조연설을 했다.
이 총재는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 중에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와 대화를 많이 나눈다는 전언이다. 경색된 한일 관계와 달리 양국 중앙은행 총재 간 교류는 활발하다. 한·중·일 총재회의, BIS, 동아시아태평양 중앙은행기구(EMEAP), G20, 아시아개발은행(ADB), 아세안+3(한·중·일) 등 각종 국제기구가 개최하는 행사에서 이 총재는 자리 배치상 자주 구로다 총재 옆에 앉아 친해졌다고 한다. 엔저로 한국의 수출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구로다 총재와의 긴밀한 교류는 이 총재가 통화정책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 총재와도 국제무대에서 종종 자리를 함께하며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
이 총재는 아시아 중앙은행 총재들과도 긴밀한 결속을 다지고 있다. 특히 제티 악타르 아지즈 말레이시아 중앙은행 총재는 며느리가 한국인임에 따라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제티 총재가 이 총재에게 태어난 손주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여줬고 둘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고 한다.
프라산 트라이랏와라쿤 태국 중앙은행 총재와 아만도 테탕코 필리핀 중앙은행 총재는 1952년생인 이 총재와 동갑이어서 서로 간에 남다른 동질감을 느낀다는 후문이다.
프로필
△강원 원주 △원주 대성고-연세대 경영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경제학 석사 △1977년 한국은행 입행 △조사부 국제경제실장 △조사국 해외조사실장 △조사국장 △정책기획국장 △부총재보 △부총재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고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