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목단체로 시작한 ‘증권구락부’…한국 증시의 모태
◇송 회장, 자본시장 태동 알린 ‘증권구락부’ 설립 주도= 송 전 회장은 일제 시대 때 증권업을 배웠다. 그가 처음 증권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일제시대인 1932년 경성환대증권이다. 이곳에는 그는 지배인까지 역임했다.
일제시대 때 증권업을 접한 그는 해방 이후 경제가 발전하려면 자본시장의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그는 초기 증권인 40명과 함께 1947년 대한증권구락부를 만들었다. 당시 대한증권구락부는 증권인들의 동호회 같은 모임이었다.
대한증권구락부가 만들어진 이후 증권사 창립이 잇달았다. 국내 1호 증권사인 대한증권에 이어 1952년에는 고려증권이 두 번째 증권사 면허를 받았다. 1953년에는 영남증권, 국제증권, 동양증권이 잇따라 설립됐다. 대한증권구락부는 자본시장의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 기관은 1953년 현재의 금융투자협회 효시인 대한증권업협회로 정식 출범했다.
송 전 회장은 거래소의 설립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55년 재무부가 만든 거래소설립위원회의 위원장은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故 윤인상 초대 증권거래소 이사장이 맡았다. 송 전 회장은 故 구용서 전 산업은행 총재, 故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 故 임문환 농림부 장관 등과 함께 위원을 역임했다. 당시 증권업협회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송 전 회장은 거래소 설립 직전인 1954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금융이란 것은 인체의 혈맥과 같고 기업에는 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순환속도가 빠른 것이 절대 요건”이라며 “자금이 장기 수면화되면 국가경제 발전에 저해되는 것은 물론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북한으로 쪼개진 당시 남한은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이 중단되자 물가가 폭등했다.
그는 이어 “금융의 폐단을 야기한 것은 해당 이후 금융기관 전체가 관치금융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 민간 시장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발언이다.
◇역대 최다 증권협회장 역임, 대한상의도 이끈 경제인= 송 전 회장은 대한증권업협회에서 최다 수장을 맡은 인물이다. 그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1~4대 회장을 맡았다. 이어 1961~1962년 10대 회장을 역임했다. 이 밖에도 15~18대(1963~1966년), 21대(1968~1969년), 25~27대(1971~1973년) 등 총 13번의 협회 회장을 맡았다.
이처럼 그가 역대 최다 회장을 역임한 데는 과감한 추진력이 배경이 됐다. 그는 3~5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할 만큼 폭넓은 활동을 한 경제인이었다. 그러나 증권업계에 첨예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면서 시장의 변화를 이끌었다.
송 전 회장은 1968년 21대 수장에 취임했을 때는 한국근업증권은행 설립, 정부 소유 주식의 시장시세 매각, 주식 이익 배당률 확대 등의 정책을 이끌었다. 그의 한국근업증권은행 설립 추진은 최종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1955년 설립된 한국연합증권금융(현 한국증권금융)의 자본금을 크게 늘리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 정부 소유 주식의 과감한 매각, 기업의 배당 확대는 현 시점에서 봐도 유효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그는 이 같은 정책을 추진한 이유를 “주식 대중화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을 할 때”라고 설명했다.
송 전 회장은 정책 추진력을 과감했던 것과 달리 성품은 너그럽고 점잖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민감한 사안과 관련한 질문에도 “임자가 말씸(말씀)이야 알아서…”라는 식의 독특한 말씨로 상황을 대처했다.
그는 1975년 3월 15일 지병인 고혈압으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항년 7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