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도 입증할 수 없는 ‘교군설’은 공상…낙랑군 위치는 평양이 아니라 현재 하북성 일대
이덕일 한가람연구소 소장
필자는 90년대 초반 중국 서점에 처음 갔을 때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이 문고판으로 판매되는 것을 보았다. 주로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발간했는데, 특이한 것은 지금 중국에서 사용하는 간체자(簡體字)가 아니라 옛날부터 쓰던 번체자(繁體字) 서적들이었다. 이런 사료들만 간체자가 아니라 번체자로 간행하는 데서 고대 사료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기’등의 고대 사료들을 사 모았다. 이는 작게 보면 책을 좋아하는 한 개인의 행위지만 크게 보면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이른바 강단사학계의 사료 독점이 깨지는 현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어느 개인이 ‘사기’ ‘한서’ ‘자치통감(資治通鑑)’ 같은 중국 고대 사료들을 소장할 수 있었겠는가? 1990년대 초만 해도 중국 서적들의 가격은 쌌고, 필자뿐만 아니라 이 분야에 관심이 있던 여러 사람들이 중국 고대 사료들을 사 모았다. 여기에 인터넷이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 크게 바뀌었다. 문고판 서적뿐만 아니라 인터넷상으로도 중국 25사를 주석까지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강단사학계가 수세에 몰리는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과거에는 이런 사료들을 자신들만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분만 발췌해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이론들을 실증사관이란 이름으로 해방 후에도 하나뿐인 정설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중국 고대 사료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수세에 몰렸다.
식민사관의 핵심이론 중의 하나인 ‘한사군=한반도설’을 입증하는 중국 사료는 전무하다시피한 반면 한사군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속출했다. 정상적인 나라의 정상적인 학계였다면 ‘한사군=한반도설’은 이미 폐기 처분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국에서 왔다는 기자(箕子)를 높이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만들었고 조선총독부에서 악용한 ‘한사군=한반도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기존의 논리를 수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식민사학계에게 ‘한사군=한반도설’은 이미 사료를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상대적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도그마였다.
그러나 한사군, 특히 낙랑군이 식민사학계의 주장처럼 평양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수십 개 이상 공개되었으므로 이 사료들이 말하는 사실에 대해 무언가 설명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교군설(僑郡說)’이다. 교군설이란 간단하게 말해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강단사학계는 한사군의 중심이라는 낙랑군 조선현의 자리를 평양 남쪽의 대동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중국 사료들은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자리를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이라고 말한다. 교군설은 개인으로 말하면 평양 대동면에 살던 ‘조선’이 하북성 노룡현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조선’의 주민등록등본에 지금은 하북성 노룡현에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북성 노룡현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많지만 그 전에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사료는 없다는 사실이다. 교군설 자체가 사료로는 입증할 수 없는 공상이란 뜻이다. 그러나 식민사학계는 사료에 낙랑군이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 진위를 살펴보자.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 권88, 진기(晋紀) 10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건흥 원년(313) 4월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 모용외(慕容廆)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요 동사람 장통이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 미천왕과 싸웠는데,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의 설득을 들은 장통은 1000가구의 백성을 데리고 선비족 모용씨에게 귀부했다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외는 창려(昌黎) 극성(棘城) 사람으로 전연(前燕)의 건국자 모용황의 부친이다.
그러나 이 사료는 첫째, 고구려 미천왕 때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군과 대방군은 평안남도나 황해도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천왕 때라면 고구려가 이미 요동반도는 물론 그 서쪽 상당 부분까지 차지한 상태였다.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장통이 1000가구를 거느리고 자국 영토를 지나 지금의 베이징 부근인 고대 요동에서 활동하던 선비족 모용씨에게 가는 것을 눈 뜨고 구경하고 있었겠는가?
둘째, 1000가구의 낙랑인이 이주한 것을 가지고 낙랑군 전체가 이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낙랑군의 인구에 대해 ‘한서지리지’ 낙랑군 조는 “6만2812호에 40만6748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략 한 가구의 구성원이 7명 정도라는 이야기다. 즉, 장통이 거느리고 간 1000가구는 7000명 정도라는 뜻이다. 40만7000여 명의 낙랑인 중에 7000명이 이주한 것을 낙랑군 전체가 이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나머지 40만 명은 어디로 갔나?
식민사학의 논리라는 것은 이처럼 조금만 들여다보면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 대방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 고구려가 단군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서쪽에 있던 낙랑, 대방을 공격하자 장통이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1000가구만 거느리고 고대 요동의 모용씨에게 귀부한 것이다. 나머지 낙랑인들은 계속해서 하북성 낙랑지역에 살고 있었다. 낙랑군 1000가구가 귀부하자 모용외는 낙랑군이란 명칭을 부여해준 것에 불과하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던 적이 없고, 따라서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이주한 적도 없다. 중국의 어느 사료에도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숭실대에서 역사학으로 학위를 받은 필자는 뚜렷한 관점과 흡입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역사 대중화와 동시에 한국역사서 서술의 전환을 이뤄낸 우리 시대의 대표적 역사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