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3년 만에 선보인 시집 ‘초혼’… 응구기, 대표작 ‘십자가 위의 악마’ 국내 초역
“시가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 시가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 고은 시인
“소설을 영어로 쓰게 되면 각 부족의 엘리트 계층을 통해 내 작품을 효율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지만, 나는 모국어로 작품을 쓸 때 더 큰 해방감을 느낀다. 기쿠유어를 사용함으로써 아프리카 언어 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다른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응구기 와 티옹오
문학계 거장들이 새 책으로 독자와 만나 그들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한국문학의 한 봉우리를 넘어 세계 시단의 중심에 우뚝 선 시인 고은(83)과 아프리카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케냐 출신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78)가 그 주인공이다.
고은은 ‘무제 시편’ 이후 3년 만에 시집 ‘초혼’을 출간했다. 이번 고은의 새 시집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은 제1부에 실린 ‘시 옆에서’로, 이는 시로 쓴 시인의 약전이다.
‘1958년이었어/ 허깨비 같은/ 도깨비 같은 나에게도 오는 시절 아니 올 수 없었던지∼ 나의 시절이 왔어/ 한국시인협회 창립 기념/ ‘현대시’ 창간호 신인 작품으로 나섰어/ 그해 ‘현대문학’ 11월호/ 3회 추천을 단회 추천으로 때려잡고 나왔어/ 시 세 편/ 죄지은 듯이 원고료를 받았어 아닌 철에 이마에 땀띠 났어.’
1958년은 고은이 승려의 신분이었을 당시 서정주와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시’와 ‘현대문학’에 신인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한 해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출가해 수도생활을 하던 중 10년간의 수도 생활을 마치고 1962년 환속한 후 지금까지 100권이 넘는 작품으로 독자와 만나고 있다.
이렇듯 자신의 이야기로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고은은 2부에 실린 장편 시 ‘초혼’을 통해 자신이 살아오며 겪었던 아픈 역사를 통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이들을 애도하고자 했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청소년 때부터 한국전쟁을 겪고 최근에 세월호까지 수많은 죽음을 봤다. 내 또래가 6·25 때 절반이 죽었는데, 그들은 죽고 나는 살아남았으니 가책이 좀 있다. 그들이 못 산 삶을 내가 대신 살아줘야 하는 과제도 있고. 그래서 그 죽음을 애도하는 사제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며 원고지 130매 분량에 달하는 이번 ‘초혼’이라는 시를 발표한 데 대한 의미를 밝혔다.
응구기 와 티옹오는 대표작 ‘십자가 위의 악마’를 한국에 처음 번역해 출간했다.
‘십자가 위의 악마’는 응구기가 케냐의 지배층을 풍자한 희곡을 집필·상연했다가 교도소에 수감된 1977년, 화장지에 몰래 써내려간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문학 언어로서 영어를 버리고 제임스 응구기라는 영어식 이름도 버렸다. 이후 그는 원래 이름인 응구기 와 티옹오라는 이름만을 쓰며 케냐 토착어인 기쿠유어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케냐의 신식민주의를 신랄하게 고발한 이 소설은 김지하 시인의 대표작인 ‘오적’의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독립 후 케냐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해방 이후 미국 주도의 개발 과정을 겪은 한국사회와 똑 닮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에서, 어렵게 학교 교육을 받은 한 젊은 여성은 도시에서 나쁜 남자들을 만나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아이를 고향 부모에게 맡긴 채 어렵게 한 회사의 비서로 취직한다. 그러나 유부남 사장의 끈질긴 구애를 거절하고 성추행에 저항하자 즉시 해고된다.
백인들은 여전히 사회 지배층으로 남아 기업을 경영하며 돈을 불리고, 노동자들은 생계비로 턱없이 부족한 임금을 받으며 착취당하다 파업을 시도하지만 경찰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이처럼 저마다 기구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현대판 도둑질과 강도질 경연대회’라는 기이한 모임의 초대장을 받고 같은 곳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응구기는 “내 책은 식민주의와 식민주의에의 저항, 결국 인간의 자유를 다뤘다”라며 “이런 주제들이 한국 독자들의 가슴속에 울림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