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12월 10일 나혜석 -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최초의 여성화가

입력 2016-12-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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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명 편집부 차장 dmjang@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 운동가였던 나혜석(1896. 4.28~1948. 12.10)은 ‘이혼고백서’를 1934년 ‘삼천리’ 잡지에 게재했다. 부부의 치부마저 드러내면서 여성들에게만 정조관념을 지키라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고발했다.

남편 김우영(1886. 10.23~1958. 4.16)과 세상을 향한 ‘이혼고백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그녀의 불륜 상대였던 최린(1878. 1.25~1958. 12)을 상대로 ‘정조 유린죄’라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첫사랑이었던 유부남 최승구(1892~1917)가 숨진 뒤 3·1 만세 운동에 참가해 5개월간 투옥됐다 풀려난 그녀는 자신을 변호했던 김우영과 결혼했다. 여러 남성들과의 연애로 문제를 빚기도 했지만 외교관 최린(33인의 한 사람)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고 최린에게서도 버림받았다. 나혜석은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의 비난과 조소를 들으면서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심신이 병들어 갔다. 수덕사, 양로원 등지를 전전하던 그녀는 해방 후 서울 원효로의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행려병자로 죽어갔다.

그녀에 대한 재조명은 1970년대 이후 나타났으며 2008년에는 고액권 화폐의 도안 인물로 거론되기도 했다. 기념관 건립은 무산됐지만 수원의 효원공원 인근에 ‘나혜석거리’가 조성돼 그녀의 동상은 수원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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