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을밀대에 올라 첫 고공농성, 노동 여성의 새벽을 깨우다
1929년 세계적 경제 공황 속에 고무공업계 역시 불황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1930년 당시 주로 기혼 여성들이 일하던 고무공장, 고무신 공장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하여 공장에 나온 여공들의 작업은 말 그대로 피땀을 흘려야 하였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작업을 하는 여성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무공장 여공들은 자연스레 파업을 빈번하게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1930년 8월 초 평양고무공업조합도 임금의 17% 삭감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이에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이 단식 파업은 벌였다. 평양 지역의 고무직공 2300명이 임금 삭감에 항의해 일으킨 파업이다. 당시 여공들의 동맹 파업은 일제 경찰과 기업주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장기간 투쟁으로 여공들만 지칠 대로 지쳤다. 때맞춰 군국체제로 치닫기 시작한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하루를 살아 가기도 버거운 평양의 일반인들은 여공들의 애환을 곁눈으로 보기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 일반 사회의 무관심 속에 여공들의 하소연을 누군가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동운동가 강주룡은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대동강 을밀대 누각에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감아 올려 줄타기하듯 올라갔다. 지상 12m 지붕 위에 올라 앉아 평양의 새벽을 가르고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여성 해방, 노동 해방!” 이 외침은 일반인들의 심장에 꽂혔다. 8시간 만에 강제로 끌려 내려온 강주룡은 옥중에서 54시간이나 단식하면서까지 임금 삭감을 막으려 했다.
강주룡은 일제에 단식으로 투쟁하며, 죽도록 싸울 각오가 이미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죽어도 좋다며 처절하게 이어간 생존권 투쟁은 7월 초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극도의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등으로 기진맥진 보석이 된 그는 1931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 가난에 쫓긴 가족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 스무 살에 중국 지린성 통화현에서 5세 연하 최전빈을 만나 혼인하고 사랑도 하였다. 24세 때 남편과 함께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2년 만에 남편이 병사하는 참담함을 겪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은 ‘남편 죽인 년’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친정으로 돌아온 그는 귀국해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돌봐야 했다. 이미 그는 남자보다 훨씬 나은 단련된 의식과 성격으로 올곧고 투철한 삶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한 많은 대동강의 새벽 햇살에 지는 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지만 한국노동운동 역사상 최초의 고공 농성자로 이름을 새기고, 노동 여성 투쟁의 총총한 빛나는 별이 되었다.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한 그에게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