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멋쟁이’를 만든 1세대 의상 디자이너
한국의 1세대 의상 디자이너로 유명한 최경자는 1911년 함경남도 안변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데다가 “계집애를 공부시켜 뭐하냐?”는 분위기 때문에 학교에 가기 어려웠지만 작은오빠의 도움으로 북청소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최경자가 가장 선망했던 대상은 외국 선교사와 대도시에서 유학하는 선배 여성들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선교사와 뾰족구두를 신은 여학생에 매료되어 자신도 ‘신여성’이 되고 싶었다.
1927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는 꿈에 그리던 유학길에 올랐다. 1932년 도쿄 국립 무사시노(武藏野) 음악학교 사범과에 입학해 피아노를 배우다가, 그 뒤 진로를 바꿔 1933년 오차노미즈(お茶の水) 양재학교에 입학했다.
1937년 도쿄에서 귀국한 뒤 함흥에 은좌옥(銀座屋)이라는 양장점을 개업했다. 이때 ‘흥문당’ 서점을 경영하던 신형균을 만나 결혼했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3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재(洋裁)학원인 함흥양재전문학원을 세웠다. 첫딸을 낳고 3일 만에 강의를 하는 등 억척스럽게 일과 살림을 병행했다.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국제양재전문학원을 설립했으며, 6·25전쟁이 끝난 뒤에는 명동 한복판에 국제양장사를 차렸다. 감각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박단마, 김시스터즈, 최은희, 노경희 등 당시 최고의 연예인들이 단골이었다.
1950년대에는 한복을 입는 여성들이 많았지만 도시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양장 붐이 일었다. 군복을 물들여 입거나 미군 군용 담요로 만든 옷을 입을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양장은 사치품처럼 인식되었지만, 미국 문화의 영향과 양장의 편리함 때문에 점차 일상복으로 바뀌게 되었다. 명동과 충무로 일대 양장점은 유행의 산실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 명동의 유명 백화점들이 앞다퉈 유명 디자이너의 옷가게를 유치(誘致)하기 전까지 명동의 맞춤 양장점은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최경자가 있었다. 1956년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던 노라노, 아리사양장점의 서수연 등과 함께 ‘명동 멋쟁이’를 만드는 유행 창출자였다. 1957년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개최해 “우리의 체격과 현실에 맞도록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59년 국제패션쇼에서 청자 드레스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최경자는 “디자이너란 손끝에서 발끝까지 또 하나의 소우주를 창조해내기 위해 자기의 독특한 빛깔과 스타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예술”이라며 디자이너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기도 했다. 1968년 국내 최초의 의상전문잡지 ‘의상계’를 창간했고, 그 공로로 1975년에 문화공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2010년에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