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 석좌교수
경제 성장기였던 1980년대의 젊은이들은 취업 걱정은 적었지만, 개발시대의 공과가 드러나면서 나름의 고민이 깊었다. 공부를 계속하려 해도 선택의 폭이 작았다. 개인적으론 대학 졸업반 무렵에 큰 결정을 몇 가지 했다. 전공을 물리학에서 수학으로 바꾸기로 했고 미국 유학을 가기로 했다. 공부하고 싶던 기하학 분야의 국내 여건이 열악하기도 했다. 계획이란 게 다 그런 것처럼 혼자 생각일 뿐이었고 실현 여부는 불투명했다. 유학 자금을 마련할 형편이 아니니 장학금까지 받아야 했는데, 수학 전공자도 아닌 먼 나라 학생을 받아줄 대학이 있을지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 잦았다.
박사 과정 중에 입대 휴학하려던 애초 계획을 바꾸어 군복무를 먼저 할까, 국내 대학원에도 지원해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다 안 했다. 스스로 못 믿는 일은 잘 안 일어나더라는 경험칙도 작용했고, 그 자리가 꼭 필요할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졸업하고 대학원 수업을 청강하던 차에 장학금이 포함된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십년감수(十年減壽)가 이런 거구나. 그 몇 해 뒤에 유학 자율화가 실행되고는 유학생이 크게 늘었지만, 아직 어려운 나라 살림에 외환 보유액도 적었던 시절이었다. 여권을 신청하려니 서울 동숭동 근처에서 해외여행자 교육을 종일 이수해야 했다. 해외에서 간첩에게 포섭되지 않는 방법 등의 내용이라 해서 떨떠름했지만, 세계 여러 나라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없던 우물 안 개구리 청년에겐 나름 흥미로웠다. 희망으로 들뜨고 낙관으로 해석해 버리는 20대 아니던가.
친구의 동창생이 같은 학교로 유학 간다고 해서 함께 출국했다. 생전 처음 타 본 비행기에서, 긴 여정 동안 뒷자리 흡연석에 자주 오갔다. ‘기내 흡연이라니?’ 하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중에 내가 비흡연자 대열에 낄 거란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초면의 동행자와는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생활비를 아낄 겸 나와서 룸메이트가 됐다. 고국을 그리는 유학생들이 모이면 기타를 들고 와서 모든 노래의 반주를 하는 재주를 가진 친구였다. 너그럽고 유쾌한 성품의 친구와 그렇게 20대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니 애 아빠가 되어 있었다.
귀국해서 공과대 교수로 있던 이 친구의 부고를 얼마 전에 받았다. 백세 시대라더니. 암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상실감에 빠지면, 바삐 사는 일상에서 하던 일들의 의미를 따지게 된다. 지금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나.
전문성으로 무장한 프리랜서들이 실리콘밸리를 바꾸는 중이라는데, 이들이 커리어를 선택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잘하거나 좋아하거나. 인공지능이 일자리 판도를 바꿀 거라는 걱정이 많은 때에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대처법일 수도 있겠다. 문화가 다르니 우리에게는 닥치지 않을 변화일까? 직업 안정성이 중요 가치가 됐고 ‘공무원 고시’라는 말이 나도는 시절이지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잘하는 일,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는 일을 찾아 끄집어내면 미래 가능성의 폭이 넓어진다.
물론 스스로 못 믿는 일은 잘 안 일어나더라는 경험칙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