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인 '블랙리스트'를 기획해 실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김 전 장관 등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 부장판사)는 27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조윤선(51)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위증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김상률(57) 전 청와대 교문화수석은 징역 1년 6월, 김소영(50) 전 문체비서관은 각각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김종덕(60) 전 문체부 장관에게는 징역 2년을, 정관주(53) 전 문체부 1차관, 신동철(56)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월과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 등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이를 기준으로 보조금을 주도록 한 것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사업 신청 단계부터 신청자 명단을 받아 청와대에서 선별하고 문체부를 통해 하달해 가이드라인 명목으로 지원배제를 지시하는 것은 어떤 명목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위법행위이자 직권남용"이라고 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협박 등은 없었다고 보고 강요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이 문체부 1급 공무원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도 무죄로 봤다. 1급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상 신분 보장 대상에서 제외돼 본인 의사에 반해 면직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김종덕 전 장관 등이 '나쁜 사람'으로 찍혔던 노태강 당시 문체부 체육국장(현 2차관)의 사직을 강요한 것은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이 헌법에서 보장한 평등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범행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었다. 재판부는 "문화예술계 지원배제는 정치 권력의 기호에 따라 지원금 지급을 차별화하는 것으로 헌법과 문화기본법이 보장하는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건전한 비판과 창작 활동 등을 제약할 수 있어 검열을 금지하는 헌법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했다.
김 전 실장 등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막대한 권력을 휘둘러 범행을 저질렀다고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 등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법치주의를 수호하고 적법절차를 준수해야 하는데 이를 부정했다"라며 "지원배제가 은밀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실행했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예술위 직원과 문체부 실무자들이 수치와 고통을 겪었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법치주의와 국가 예술지원의 공정성에 대한 문화예술계와 국민의 신뢰가 훼손됐고, 그로 인한 피해 정도는 쉽사리 가늠하기조차 어렵다"고 했다. 다만 특정 개인 등 사익 추구를 위해 범행을 저지른 다른 국정농단 사건들과의 차이점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 등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박근혜(65) 전 대통령 지시로 ‘블랙리스트’ 작성을 기획해 정부 비판적인 인사나 단체에 정부 보조금을 주지 못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김 전 실장과 김 전 장관은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에 미온적 태도를 보인 문체부 실장들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강요한 혐의 등도 있다.
앞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김 전 실장에게 징역 7년, 조 전 장관과 김 전 수석에게 징역 6년, 김 전 비서관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 정 전 차관에게는 각각 징역 5년을 선고해달라고 했다. 특검은 "김 전 실장 등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네편 내편으로 갈라 나라를 분열시켰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