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요즈음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에 오를 때엔 나도 몰래 눈을 내리까는 습관이 생겼다. 잘못했다간 남의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치한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전한 발걸음을 위해 잠시 눈을 치켜뜨면 참으로 아슬아슬한 풍경에 절로 민망해진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더 이상 감출 것 없는 여성들의 복장 탓이다. 치마는 허벅지 위로 속옷과 비슷한 높이로 올라가 있다. 반바지는 두 다리가 갈라지는 부분까지 올라가 있다. 과다노출이 오직 시원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한 의도적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시선에 시비를 거는 건 좀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눈이 무슨 죄가 있나! 보이는(보라는) 걸 보았을 뿐인데, 왜 보았다고 꾸짖고 나무라고…, 그것도 모자라 치한이네 변태네 하느냐’는 억울함의 토로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그를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명기),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잠언) 등 눈을 중요시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한 척독(尺牘, 짧은 편지)에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느니 차라리 바늘을 잡고 눈동자를 겨누어라’라는 아이들 말이 있다”고 썼는데, 눈이 중요하지 않다면 이런 글을 쓰시지 않았겠지요.
연암보다 약간 이른 시대를 살았던 로렌스 스턴이라는 영국 소설가도 “눈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분명한 획을 그어,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심상(心象)에 남기거나 때로는 제거한다”며 눈이 입보다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과학자들도 눈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진화론의 선봉장이자 전도사인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왔을 때 한 인터뷰에서 “시력에 관한 기관은 굉장히 유용하기 때문에, 인류가 멸종해도 눈은 진화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나는 이 역시 눈의 중요성을 확인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여러 감각기관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눈이 어쩌다가 ‘욕망과 죄의 원천’으로 여김을 받게 됐는지!
어쩌면 시베리아 키르기스 지역의 전래동화가 그 대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냥 도중 길을 잃은 칸의 외아들은 숲속에서 나뭇가지를 모으는 아가씨를 보았다. 한눈에 반한 왕자는 그녀의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 말 머리만 한 황금 덩이를 결혼 지참금으로 제시했다. “아니요.” 아가씨가 말했다. “여기 작은 자루를 채워 주세요.” 골무보다 약간 큰 자루를 본 왕자는 가소롭다는 듯 “하나도 채 안 들어가겠는데”라고 말하고는 동전 하나를 던지고, 또 하나 던지고, 세 개를 던지고, 결국 모든 것을 던졌다. 매우 당황한 그는 아버지에게 갔다. 부왕은 보물을 모두 모아 자루에 넣느라 국고를 탕진하고는, 자루 바닥에 귀를 대었다. 그 후로도 두 배를 더 넣었으나, 바닥에서는 짤그랑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노파는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자 하는 인간의 눈이랍니다”라고 말하고는 흙 한 줌을 집어 단번에 자루를 채웠다.>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가 자전적 소설 ‘재능’에 이 동화를 옮겨 넣은 것은 ‘견물생심(見物生心)’을 경계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일 겁니다. ‘말조심’보다 ‘눈조심’이 더 필요하다는 겁니다. 끝없는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눈,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 한 줌 흙이 던져질지 모르는 인간들의 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