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이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이 부회장이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을 도와달라는 묵시적인 청탁과 함께 박근혜(65) 전 대통령에게 89억여 원 상당의 뇌물을 건넸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진동 부장판사)는 25일 뇌물공여 등 혐의로 기소된 이 부회장에게 이같이 선고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최지성(66) 전 미래전략실 실장과 장충기(63) 전 차장에게는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박상진(64)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황성수(56) 전 삼성전자 전무는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 부회장 등에게 37억6700여만 원 상당의 추징금도 선고했다.
◇뇌물 89억 원 '유죄'..."승계작업 대가로 뇌물 건넸다" = 재판부는 정유라(21) 씨 승마 지원 72억9000여만 원,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 16억2800만 원 등 총 89억2000만 원 상당의 뇌물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애초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뇌물 혐의액은 298억 원(약속금액 포함 433억 원)이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간 3차례 독대 과정에서 승계작업에 대한 '묵시적인 청탁'이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둘 사이에 직접적인 청탁은 없었지만, 암묵적으로 청탁에 대한 인식과 양해가 있었다고 봤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경영권 승계 관련 도움을 기대하고, 뇌물을 건넸다고 본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역시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의 경영권 승계 관련 현안을 충분히 알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에 이 부회장의 계열사 지배력 확보 등 승계문제에 대해 청와대 민정수석실 등에서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와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 쓴 보고서 등을 근거로 들었다.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폭넓은 직무 범위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 각종 경제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포괄적이고 강력한 권한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 씨와 박 전 대통령의 공범 관계도 인정했다. 이 사건에서 또 다른 쟁점은 '최 씨가 받은 돈을 박 전 대통령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지'였다. 재판부는 "대통령은 최 씨와 오래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고 취임 이후에도 국정 운영에서 최 씨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이 최 씨로부터 삼성의 승마 지원 진행 상황을 계속 보고받고, 관련된 인사를 직접 챙겼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 등 삼성 임원들이 최 씨와 박 전 대통령과의 '친밀한 관계'를 알고, 정 씨를 지원했다고 판단했다. 늦어도 2015년 3월, 대통령의 승마 지원 요구가 최 씨의 딸 정 씨에 대한 지원 요구라는 점을 알았다는 것이다. 같은 해 7월에는 최 씨에게 돈을 주는 것이 사실상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네는 것과 같다는 사실도 알았을 거라고 짚었다.
범행의 '정점'에는 이 부회장이 있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은 2014년 9월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 이후 정 씨에 대한 승마지원이 이뤄지는 기간 동안 최 전 실장 등에게 대통령에게 요구를 전달하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영재센터 지원 과정에도 이 부회장이 깊이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은 뇌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 등이 미르·K스포츠재단이 최순실의 이익 추구 수단이라는 것을 알기 어려운 점 △재단 출연금과 출연 일정 등을 직접 결정하지 않은 점 △대통령이 여러 대기업에 출연을 요청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대통령이 먼저 기업인에게 제3자에게 금품을 공여하라고 요구할 경우에 기업인 입장에서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할지를 자유롭게 결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횡령·재산국외도피·범죄수익은닉규제도 일부 '유죄' = 재판부가 정 씨에 대한 승마지원 등을 유죄로 보면서, 회삿돈을 빼돌려 뇌물을 건넨 혐의도 같은 액수가 유죄로 인정됐다. 회사 이사 등이 회사 자금으로 뇌물을 줬다면 업무상횡령에 해당한다는 2013년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들었다.
최 씨 소유의 독일 코어스포츠와 컨설팅 계약을 맺고 4회에 걸쳐 37억3000만 원을 보낸 혐의도 역시 유죄로 봤다. 재판부는 "코어스포츠에 대한 용역대금 명목의 금원 지급은 뇌물을 공여한 것으로 정상거래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뇌물을 주고받은 것을 숨기기 위해 허위 계약서를 작성한 혐의도 대부분 유죄로 판단했다. 지난해 국회 국정조사에서 위증한 혐의 역시 유죄로 결론내렸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그룹 임원들이 우리나라 경제정책에 막강하고 최종적인 결정 권한을 가진 대통령에게 승계 과정에 대한 도움을 기대해 거액의 뇌물을 제공했다"라며 "그 과정에서 삼성전자 자금 횡령, 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 범행에 나아갔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 사건의 본질"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과 대규모 기업집단이 관련된 정경유착이라는 병폐가 과거사가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로 인한 상실감 상실은 회복하기 쉽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 부회장 등은 박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경영권 승계를 도와달라는 청탁을 하고, 그 대가로 최순실(61) 씨 딸 정유라(21) 씨의 승마훈련 지원과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등 총 433억2800만 원을 건네거나 주기로 약속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앞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의 범행은 전형적인 정경유착과 부패범죄로 경제민주화와 헌법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라며 이 부회장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최 전 실장과 장 전 차장, 박 전 사장에게는 각각 징역 10년을, 황 전 전무에게는 징역 7년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