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217. 정순왕후 송씨(宋氏)

입력 2017-10-2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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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가 돼야 했던 비운의 단종비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1440~1521)는 조선의 왕비 가운데 유일하게 비구니가 된 인물이다. 1440년(세종 22)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송씨는 1454년(단종 2) 왕비에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된 이듬해에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했고 곧이어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으로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면서 송씨는 노산군(魯山君)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송씨는 단종을 따라 영월로 가는 대신 한양에 홀로 남았다. 1455년 단종은 유배지에서 사사되었고, 송씨는 왕실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송씨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는 명확하지만 단종이 유배된 직후 송씨의 신분과 처지가 상당히 위태로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남편이 폐서인의 신분이 되면 그 부인은 관노(官奴) 혹은 공신들의 노비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폐서인이 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순천군의 관노가 되었고, 단종의 후궁 권중비는 공신 집안의 사노(私奴)로 배속되었다. 이러한 전후 상황으로 미루어 송씨가 출가를 한 것은 왕비로서의 마지막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구 귀족인 여산송씨 집안의 숭불적 성향도 왕비의 출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송씨의 행적은 야사에만 등장할 뿐 역사서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야사에는 왕후가 세조의 경제적 지원을 거부하고 걸식으로 연명했다거나, 동대문 밖 청룡사에서 출가해 평생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이는 실제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발견된 정순왕후의 고문서에는 그녀가 정업원에서 출가를 한 후 스승인 정업원 주지 이씨로부터 전해 얻은 인창방(현재 서울 숭인동·창신동 일대)의 집에서 살아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송씨가 인창방에서 살아가던 16세기 초는 창덕궁 인근에 있던 정업원이 연산군에 의해 폐사되고, 정업원 비구니들이 도성 밖으로 쫓겨난 시기에 해당된다. 이때 정업원 비구니들은 인창방 일대에 새롭게 정업원을 세우고 승가를 유지해 나갔는데, 당시 정업원의 주지가 정순왕후였다.

정순왕후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인창방의 토지에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목재로 새롭게 집을 지은 다음 이곳에 단종의 사당과 함께 자신의 비구니 제자들이 살아갈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사당은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에게, 나머지 가옥은 비구니 제자들에게 상속하였다. 말년에 송씨는 인창방의 정업원을 떠나 정미수의 집에서 여생을 마쳤고, 해주정씨 선산에 묻혔다.

송씨가 다시 왕후로 복권된 것은 그로부터 약 180여 년이 흐른 후였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면서 송씨도 복권되었고, 묘는 사릉(思陵)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영조는 정순왕후가 살던 인창방의 집터에 왕후를 기리기 위해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를 세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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