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1부 기자
“미국발 통상압박이 세탁기와 철강을 넘어 반도체, 디스플레이까지 영향을 줄 것 같아서 걱정된다. 그런데 정부는 도대체 뭘 하는지 잘 모르겠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정부와 정치권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을 옥죄야 하는 집단으로 보지 말고 힘들 땐 도와줬으면 좋겠다.”
최근 전자업계의 한 고위 임원은 기자와 만나 이같이 토로했다. 이 임원은 더 많은 말을 쏟아내려다가 “여기까지만 말해야겠다”며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 업계 OB(올드보이)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정부가 아니라, 업계 선배들이라는 얘기였다. 이어 그는 OB들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지금 기업인들은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초부터 국내 산업 전반으로 수출 전선에 적색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산 세탁기, 태양광전지·모듈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조치)에 이어 강력한 철강 수입 규제안을 꺼내들면서 미국 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국내 산업 전체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수출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공유할 뿐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통상압박 강화와 관련해 정부는 그저 “대응하겠다”는 식의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이번 통상 갈등이 한·미 동맹과 우리 안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답답한 건 사실이다.
앞으로 정부가 제대로 된 약을 처방하지 못한다면, ‘수출 효자’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에 불똥이 튀어 국가적인 불행이 초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상압박으로 인해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