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사에라] 벨소리

입력 2018-05-2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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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소설가 / 스튜디오/2014.08.07/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자네, 휴대폰 벨소리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별다른 뜻이 있어서 물은 건 아니라네. 예전에 한번 그런 글을 읽은 적 있었다네. 그 사람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번에 알아맞힐 수 있다는... 어떤 사람 즐겨찾기에는 신문사 홈페이지만 죽 이어져 있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 즐겨찾기 목록에는 은행이나 증권회사만 잔뜩 들어찬 경우도 있지. 그게 그 사람 정체성과도 연결된다는 뜻이라네. 그 말을 듣고 난 뒤에 우리 사무실 사람들 컴퓨터를 한 번 쓱, 어깨너머로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과연,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지더구만. 국토부 아파트실거래가 조회가 맨 위에 있는 친구도 있고, 주짓수 갤러리가 가운데 딱 버티고 있는 친구도 있더군. 겉보기엔 얌전한 친구였는데, 속에선 맹렬한 격투기 피가 흐르고 있었던 거지. 그도 아니면 나 같은 부장들 볼 때마다 메치기를 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거나...

휴대폰 벨소리도 그런 게 아니겠나?

고향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올해 여든이 되셨는데, 이분 휴대폰 벨소리는 그냥 딱 기본음이라네. 띠리리리, 띠리리리, 하는 그거 말일세. 우리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만 40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직한 분이라네, 그냥 딱 기본음 그대로 사신 분이지. 한데, 우리 아버지보다 세 살 아래인 작은아버지 벨소리는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랫말이 나오는 트로트라네. 이분은 젊은 시절, 정치인들 뒤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면서 할머니 속깨나 썩이던 양반인데, 결국엔 아무 빛도 못 보고 지금은 마을 노인회 회장을 하고 있다네. 봄가을에 노인회 야유회 같은 델 가면 제일 먼저 취하고 제일 마지막까지 관광버스 안에서 춤을 춘다고, 아버지가 몇 번 혀를 차는 걸 들은 적이 있다네. 거기에 우리 막내 작은아버지 벨소리는… 이분은 두 형님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못 하고 평생 농사만 지은 분인데… 이분 벨소리는 ‘쾌지나 칭칭 나네’일세. ‘정월이라 대보름날 쾌지나 칭칭 나네’ 하는 그 민요 말일세. 나는 처음에 이분이 농사를 오래 지어서 그런가 했더니, 그건 아니고… 이분이 몇 년 전부터 청력이 약해져서, 그래서 사촌들이 일부러 그 벨소리를 설정해주었다고 하더구만. 다른 소리는 잘 못 들어도, 쾌지나 칭칭 나네는 잘 들으신다고… 그러니, 이 두 분이 함께 있으면 아주 볼 만하다네. 지난 설날에도 아버지가 우리 형제들과 사촌 형제들까지 죽 모아놓고 이런저런 덕담을 하셨는데, 무슨 말만 하려 하면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랫말이 튀어나오고, 또 무슨 말만 꺼내려 하면 ‘하늘에는 별이 총총 쾌지나 칭칭 나네’ 민요가 흘러나왔다네. 설날이니까 막 이곳저곳에서 인사 전화가 오니까… 어떨 땐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쾌지나 칭칭 나네’가 막 뒤섞이기도 했다네. 그러니, 무슨 설날 가족 모임 같지가 않고 마치 전국노래자랑에 온 거 같았다네. 사촌 동생은 내게 조용히 귓속말로 그러더구만. 형님, 무슨 전주대사습놀이에 온 거 같아요.

한데, 내가 들어본 휴대폰 벨소리 중에서 최고는…

자네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 영업 3부에 근무하는 최기식 부장 벨소리라네. 이 친구는 나랑 입사 동기라서 꽤 마음이 가는 친구인데… 평소에 워낙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서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네. 둘이서 술 한잔 같이해 본 적 없고, 따로 만나서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입사 동기라서 그 친구도, 나도, 얼굴 보면 반갑고 정이 가고, 그런 사이였다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거니까…

한데, 지난달 초였던가, 월례 간부회의를 하고 있는데, 이 친구가 그만 휴대폰 울림을 진동으로 해놓지 못하고 들어온 모양일세. 그래서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이 친구의 벨소리를 듣게 됐는데… 최 부장의 휴대폰 벨소리는… 그게… 그게 참…

성덕대왕 신종 종소리였다네…

거 왜 경주에 있는 에밀레종 알지 않는가? 그게 성덕대왕 신종인데…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 친구가 직접 거기 국립박물관에 가서 그 소리를 녹음해 왔다고 하더구만. 그리고 그 소리를 휴대폰 벨소리로 설정한 거구…

처음엔 모두 당황했다네. 월별 영업실적 발표하고, 다음 달 목표치와 주요 계획 사항 같은 걸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이사님도 참석한 자리였는데… 갑자기 웬 종소리가 웅숭깊게 들리니까… 더구나 천년 된 종소리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나름 웅웅거리는 진동도 꽤 오래가는 거 같더구만. 실적을 높이자고 마음을 다잡는 자리였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리니까 왠지 한적한 절집에 온 거 같고, 그러자니 마음도 평온해지고, 그냥 모든 게 다 부질없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같은 마음이 되니까… 그러니까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황한 거지. 그래도 어쨌든 그냥 휴대폰 벨소리니까, 금세 모두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네. 이 친구도 바로 핸드폰을 껐고…

회의가 끝난 후 내가 따로 이 친구한테 물어봤다네. 나는 늘 그런 게 궁금한 사람이니까. 휴대폰 벨소리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면, 그럼 이 친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원래 불자인가? 아니면 경주 최씨인가? 내가 지나가는 말투로 묻자, 최 부장이 씩 웃으면서 그러더구만.

“그냥… 부적 같은 거지, 뭐… 좋은 전화만 오라고, 좋은 소식만 들려오라고…”

좋은 전화만 오라고 휴대폰 벨소리를 성덕대왕 신종 종소리로 설정해 놓았다는 이 친구의 말이 처음엔 당최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네. 그건 일종의 바람 같은 거 아니겠는가? 우리 나이쯤 되면 이제 휴대폰 벨소리만 들려도 두려울 때가 많지 않은가? 두려우니까 그렇게 천년 된 종소리로 바꿔놓은 거겠지. 나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네. 그 마음이 어쩐지 우리 정체성이 되어 버린 거 같은 기분도 들고… 뭐 그랬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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