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추리소설의 여왕은 만년필 세계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이 있다. 그가 유별나게 만년필을 좋아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수많은 작품 중 만년필이 나오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나마 ‘3막의 비극’에 한 줄 정도 나온다. “만년필이란 참으로 말썽을 부리는 물건이야. 막상 쓰려고 하면 나오지 않거든.” 이 정도가 전부이다.
800쪽이 넘는 자서전을 봐도 만년필에 관련된 것은 한두 단어 정도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는 언니가 물려준 타자기로 대부분의 글을 썼다. 즐겨 하지 않았는데 웬 영향력? 아이러니하게도 만년필 때문이다.
독일 회사 몽블랑사(社)는 1992년 만년필에 작가의 이름을 붙여 해마다 한정판을 내놓은 것이 성공하여 만년필 세계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 첫 번째는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였고 이 시리즈의 두 번째가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였다.
헤밍웨이 만년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애거사 크리스티 만년필도 최고의 걸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1926년 출간된 데 맞춰 1920년대 만년필을 기본으로 삼았다. 바뀐 것은 편리하게 잉크를 넣을 수 있게 요즘 방식으로 바꾸고 당시 선택이었던 클립을 끼운 것이다. 바로 이 클립이 신의 한 수였다. 뱀 한 마리가 만년필을 칭칭 감고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인상적인 클립은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의 추리소설 80여 편 중 절반 이상이 잔인한 살인 묘사가 없는 독(毒)을 이용한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독 하면 떠오르는 뱀, 독을 이용하여 살인 장면을 연출하는 작가. 그 작가를 표현하는 데 뱀만 한 것이 없던 것이다.
원조가 어찌되었든 애거사 크리스티 만년필은 크게 성공하였다. 몽블랑의 위상이 더욱 탄탄해진 건 물론이다.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뱀 만년필만큼은 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1997년 파커는 몽블랑처럼 1900년대 것과 모양은 같게 요즘의 잉크 넣는 방식으로 바꾸고, 몽블랑의 패키지보다 더 화려하게 파커 스네이크 한정판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냥 뱀이 감겨 있는 만년필일 뿐, 등목을 하고 평상(平床)에 누워 회색 뇌세포를 가진 조그만 탐정(에르퀼 푸아로)의 추리를 감탄했던 예전의 추억 같은 것들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