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 자본시장부 기자
낭랑한 목소리의 여성이 배에 힘을 가득 주고 외쳤다. ‘할 만큼 했다’고 남성 중심 사회를 디스하던 래퍼가 공연 중 달아오른 열기에 가사를 잊자 청중은 더 환호했다. 벌써 2주나 지난 한 시위현장의 목소리지만 매일 노트북을 열 때마다 생각난다. 너무 생경해서다. 여자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태어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럴 수도 있는 건 위력을 가진 자의 말이다. ‘나는 그래도 된다’거나 혹은 그가 위력으로 약자를 어여삐·기꺼이 봐줄 때 쓴다. 부모가 아이에게, 선생이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에게 따뜻하게 건네기도 하지만 햇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쬐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이 원하는 건, 바로 그런 언어들이 뒤집히는 사회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약자가 갖게 되는 것. 가진 권력이 클수록 ‘이래도 되나’ 하는 의문을 매 순간 되짚는 것이다.
‘안희정은 유죄다’ 빨간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은 시위 초반에 한 방송사 카메라를 쫓아냈다. 해당 언론사는 수차례에 걸쳐 안희정 측 증언을 여과 없이 내보냈었다. 나는 취재를 위해 그 자리에 있진 않았지만 엉덩이가 뜨거워 달싹거렸다. 말의 권력을 쥔 자들이 스스로 검열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카메라를, 펜대를 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백래시’급도 안 되는 어쭙잖은 반격에 여성은 이제 졸지 않는다. 그날 거리의 시위대에게 한 남성이 버스 창문을 내리고 “못살겠으면 한국에서 꺼져라”라고 외쳤다. 사실 한 명이 아니고 몇 시간에 걸쳐 여러 명이 그랬지만 여성들은 쓰고 있던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고 “너나 버스에서 내려와봐”라고 맞짱을 신청했다. 물론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권력의 자체 심의는 무겁고, 약자의 반란은 유쾌한 세상을 꿈꾼다. “여자가 더우면 웃통 좀 깔 수 있지!”, “막내가 바쁜데 회식 안 갈 수 있지!”,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정치나 연애가 더 재밌을 수 있지!” 또 뭐가 있을까. 굳어진 머리를 깨야만 도태되거나 쫓겨나지 않을 텐데, 요새 마음이 좀 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