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때보다 ‘급’ 낮춰 재입사... 제한 없는 5급 이하가 큰 문제, 지역 민간기업과 유착 가능성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2013년부터 올해 6월까지 4급(서기관) 이상 퇴직 공무원의 재취업 심사 건수는 1394건에 달했다. 공직자윤리위원회는 이 중 1226건(88%)에 대해 취업 가능·승인 결정을 내렸다. 기관별로 조직 규모가 큰 국방부는 승인이 300건에 달했고, 청와대와 경찰청, 검찰청에선 각각 88명, 83명, 73명이 재취업을 승인받았다. 중앙행정기관 중에선 산하·유관기관이 많은 산업통상자원부(49건)와 국토교통부(43건)의 취업 가능·승인 건수가 많았다.
관피아 방지법에 따라 2015년부터 4급 이상 공무원은 퇴직 전 5년간 일했던 부서나 기관의 업무와 관련이 있는 곳에 3년간 취업할 수 없다. 3년이 안 돼 취업하려면 공직자윤리위의 취업심사를 통해 가능·승인 결정을 받아야 한다. 퇴직 공무원이 직전 소속 기관의 산하기관이나 민간기업에 재취업해 정부를 상대로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관피아 방지법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불승인 비율이 12% 수준에 불과하고, 5급 이하 퇴직 공무원들은 재취업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계급정년이 존재하는 국방부나 별정직 비율이 높은 청와대 등은 재취업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 이른 나이에 퇴직해 당장 재취업을 하지 않으면 소득이 끊겨버릴 수 있어서다.
중앙행정기관은 상황이 다르다. 정년이 남아 있음에도 퇴직해 산하 공공기관 등에 재취업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국토부의 경우 한국철도시설공단, 한국공항공사, 교통안전공단, 한국감정원, 한국철도공사 등 산하 공공기관과 한국도로협회 철도신호기술협회, 렌터카연합회, 대한건설협회, 공간정보산업협회, 화물자동차운수연합 등 유관 협회가 주된 재취업처다.
중앙행정기관 재취업의 주요 원인으로는 공무원들의 퇴직 관행이 꼽힌다. 인사적체로 인한 후배 공무원들의 승진 지연을 해소하기 위해 선배 공무원들이 반강제적으로 물러나는 식이다. 이른바 ‘에이스’들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일찍 승진하면 일찍 옷을 벗는다. 소년 급제로 40대에 고위공무원(1·2급)으로 승진한 경우에는 50대 초반에 퇴직해야 하는 구조다.
이른 퇴직은 생계형 재취업으로 이어진다. 능력이나 전문성을 인정받은 경우에는 공공기관장으로 임명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현직에 있을 때보다 ‘급’을 낮춰 가는 사례가 많다. 2016년 12월 한 실장급(1급) 퇴직 공무원은 통상 4급 공무원들이 가던 자리로 재취업해 “재취업은 어쩔 수 없더라도, 후배들의 사기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 고위공무원은 “50세 안팎에 1급으로 승진한 사람이 나가지 않으면 그 아래 급수들은 줄줄이 적체된다”며 “고인 물은 썩듯, 조직도 피가 안 돌면 곪고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고 나간 사람들의 재취업 자체를 막아버리면 그 사람들은 자식 등록금, 생활비는 어디서 구하느냐”며 “결국 전문성을 살려 공공이나 민간 쪽에 재취업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부분들까지 관피아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건 동의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5급 이하 퇴직 공무원들의 재취업에 마땅한 규제가 없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본부만 존재하는 중앙행정기관들은 5급 이하 공무원들이 퇴직 후 갈 수 있는 자리가 마땅치 않지만, 고용노동부·국토부·환경부 등 지방관서가 존재하는 기관들은 5급만 돼도 해당 관서의 과장급이다. 지역의 민간기업 등에 취업해 로비 창구로 활용될 우려가 크다.
한 중앙행정기관 소속 공무원은 “5급 이하는 취업심사 자체를 받지 않아 누가 어디로 가는지도 확인이 안 된다”며 “지방관서에선 5급만 돼도 관서 내에서 위치가 상당하기 때문에 민간에 나와 관서와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