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행복한 인삼이 살고 있었어. 그런데 인삼 친구들이 볼 때 이 행복한 인삼은 분명 고구마거든. 인삼밭 친구들이 모두 인삼이니까, 고구마는 자기도 인삼인 줄 알았던 거지. 인삼 친구들은 고구마한테 가서 따졌어. 너는 사실 인삼이 아니라 싸구려 고구마라고. 그러니까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고구마는 그 말을 듣고 놀랐지. '내가 고구마라니!' 그런데 다음날에도 고구마는 너무 행복한 거야. 인삼 친구들이 의아해하니까 고구마가 말했어. '난 행복한 고구마야!'"
올해 9월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윤창호 씨 친구들은 '역경을 헤치고 창호를 향하여'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친구들은 이 블로그를 통해 음주운전 사고 피해자들과 소통하면서, 음주운전 근절 운동을 벌이고 있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많은 글은 모두 하나의 아이디로 업로드된다. '행복한 고구마'다.
5일 오후 동작구에서 만난 김민진 씨는 행복한 고구마를 언급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윤창호법 국회 통과를 끌어낸 '윤창호 씨 친구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행복한 고구마는 창호가 저한테 자주 들려주던 이야기인데, 여러 번 들어도 지겹지 않았어요.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은 뭘 해도 행복하니까, 행복한 고구마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었죠."
블로그 이름 '역경을 헤치고 창호를 향하여'에는 윤 씨의 흔적이 그대로 녹아있다. 윤 씨가 생전에 좋아했던 문구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를 살짝 바꿨다.
"지금 저와 창호 친구들이 겪고 있는 이 상황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역경이라고 생각해요. 이 역경을 극복하고 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창호 속에 다다르지 않을까요?"
윤창호라는 이름 세 글자는 친구들뿐 아니라 국민 마음속에도 깊게 새겨졌다. 친구들이 올린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친구 인생이 박살 났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청원은 4일 만에 20만 명, 한 달 만에 40만 명이 넘는 국민 동의를 얻어, 청와대 답변을 이끌어냈다. 이에 힘입어 지난달 29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음주 운전자 처벌을 크게 강화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김 씨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그는 음주운전 사망 사고의 최저 형량을 징역 5년으로 잡았지만,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징역 3년으로 낮춰 통과된 것을 지적했다. 최소형량이 5년이 아닌 3년이면, 징역이나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현행법상 징역 3년 이하까지는 판사가 감형을 해주지 않아도 집행 유예가 가능하다.
이제 친구들은 제2의 윤창호법을 준비 중이다. 그는 "이번 본회의를 통과한 윤창호법은 예외적으로 12월 18일부터 시행된다"면서 "6개월 동안 이 법이 얼마나 음주운전 근절에 효과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징역 하한선을 더 높이는 제2의 윤창호법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2의 윤창호법 준비를 위해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조만간 위원들을 만나 형량을 높이는 것에 대해 강력히 주장할 예정이다.
관심이 높아진 만큼 김 씨와 친구들을 향한 악성 댓글도 늘고 있다. 김 씨 사진이 실린 기사에는 "친구가 죽었는데 왜 웃고 있냐", "이런 활동들이 다 취업에 도움되니까 하는 것 아니냐", "음주운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고려대학교 학생이라 주목받는 것"이라는 내용의 악성 댓글이 종종 달린다.
김 씨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빠가 항상 '10명 중 7명은 나한테 관심이 없고, 2명은 나를 좋아하고, 1명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니, 나를 좋아하는 2명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라'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때문에 최대한 훌훌 털어버리려고 해요."
김 씨가 자신을 위로하는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다. 윤창호 씨가 평소에 끼던 반지에 새겨진 문구라고 한다. 김 씨도 자신의 반지에 이 문구를 새겼다.
"창호는 '나쁜 일이 생기면 언젠가 지나가니까 낙담하지 말고, 좋은 일이 생기면 이 또한 지나갈 일이니 자만하지 말라'고 말했어요. 지금 제게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어느 정도의 목표는 이뤘다. 국민 청원도 40만 명을 넘어 청와대의 답변을 받았고, 원안보다는 약하지만 윤창호 이름을 딴 음주운전 처벌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 시점에 김 씨와 친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국민과 언론의 '무관심'이었다.
"관심이 점점 사그라지는 게 느껴지면서 두려워질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하면 관심도 자연히 따라오게 될 것이고, 관심을 못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해오던 활동을 멈출 것은 더욱더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의 음주운전 적발은 꺼져가는 관심의 불씨를 살리는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윤창호법 발의에 동의한 104명 의원 중 한 분이 음주운전을 하다 단속에 걸렸다고 해서 너무 어이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윤창호법에 대한 꺼져가던 관심이 다시 살아난 거죠." (웃음)
김 씨의 무기는 '진심'이다. '사람에게 진심이 있으면, 연설에서는 어떠한 기교도 필요 없다'. 윤창호 씨 어머니가 해준 말이란다.
김 씨의 진심은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막는 것이다. 내가 오늘 당장 음주운전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내 주변의 누군가가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하게 될 수 있음을 모두가 깨닫게 되는 것. 음주운전 근절 운동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학내에서 윤창호법 관련 다큐멘터리 촬영이 있다며 바삐 짐을 챙겼다.
"무너지는 법을 몰라서 무너지지 않는 게 아니에요. 무너질 수 없어서 더 강해지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