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당시 재계 서열 3위 대우그룹의 공개채용 공고.
채용공고가 꼭 ‘강남스타일’ 같은 느낌이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으흠, 1절만 하자.
아무튼 당시에 그 긍지 높은 대우인이 되려면 이 정도는 거뜬히 해낼 수 있어야 했다.
과연 대우그룹은 어떤 사람을 원했을까!
◇재계 3위 대우 - 노래방에서 서른곡은 부를 수 있는 사람?
자 하나씩 읊어보자. 특히 재미있는 자격 요건(?) 위주로 설명하겠다.
➀삼일동안 밤을 새울 수 있는 사람 - 흠... 간략하게 써 있다 보니 이게 정확히 어떤 인재를 요구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체력이 강건한 인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닐 거다. 만약에 체력이 문제라면 팔굽혀펴기라던가 턱걸이, 축구, 수영같은 ‘스포츠를 많이 하는 사람’이란 말로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대우는 신입사원들이 말 그대로 ‘삼일간 밤을 새울 만한 사람’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왜냐고? ‘밤새 일을 시키려고’.
삼일간 밤을 새면 그것만으로도 72시간이다. 지금은 주 52시간 근무제라는 것이 도입된 시대다. 지금 같으면 여론의 지탄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현행법 위반이다.
➁삼일동안 놀 수 있는 사람, 노래방에서 서른곡은 부를 수 있는 사람 - 비슷한 내용이라 묶어봤다. 삼일동안 놀 수 있는 사람? 이건 밝고 쾌활한 인재상을 찾는다고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겠다.
근데 노래방에서 서른 곡? 일단 이 광고가 게재되던 시기에 태어난 ‘90년생들이 오고’ 있는 2019년의 시선으로는, 회식에 노래방에 가는 것을 종용하는 순간 거기서부터가 이른바 ‘극혐’이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목표가 달성하기 너무 어렵다. 기자는 원래 일주일에 두 세번은 혼자 코인노래방에 간다. 이렇게 열렬히 노래방을 좋아하는 사람도 한 번 가서 서른 곡까지는 부르기가 어렵다. 일단 그 많은 레파토리를 다 생각해내기도 어렵거니와, 생각해낸다 하더라도 그걸 다 부르면 목이 상한다. 대우그룹은 가히 초인적 역량을 가진 이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➂못생긴 파트너를 만나도 세 시간은 봉사하는 사람 - 이 부분은 기자가 못생긴 사람을 대표해서…는 아니고, 아무튼 할 말이 많다.
나름대로 위트가 있어 보려고 넣은 유머 같은데, 하나도 안 웃긴다. 일단 이 문구는 못생긴 사람은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연애가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심지어는 그런 사람과 만나는 것은 ‘봉사’하는 행위라고 까지 심각한 수준의 폄하를 일삼고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 그룹의 채용공고가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이런 광고가 게재됐다면 대우그룹은 96년 대졸 신입사원 채용을 진행조차 못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다음은 당시 재계 부동의 원톱. 현대그룹이다.
◇재계 1위 현대 - 파격의 무시험 채용!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고루함
지금의 삼성이 가진 독보적인 재계 원톱의 자리는, 1995년 당시 현대그룹의 차지였다. 현대그룹이 2000년에 왕자의 난으로 분열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범현대계열 그룹에 대해 세간에 퍼진 인식과 마찬가지로, 이때도 어딘가 고루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지는 특이한 채용공고다.
일단 한문이 너무 많다. 한문 잘 못 읽으시는 분들을 위해 번역해 드리자면 ‘현대가 인재를 무시험채용으로 널리 모집합니다.’라고 쓰여있다. 맨 아래에는 ‘현대 인력관리위원회’라고 써있고, 중앙 상단에는 ‘남·녀 대졸 신입사원 모집’이라고 적혀 있다.
공고문에만 한문이 많은 게 아니라, 아예 채용 전형 과정 중 면접시 ‘간단한 한자 테스트’를 본다고까지 돼 있다. 이 때는 1995년이다. 1987년에 창간된 한겨레신문이 순수 한글 사용 신문을 표방하고 나온 이래, 국한문 혼용체의 세가 서서히 약해져 갈 무렵이다. 근데 당시3대 대기업 그룹 중 유일하게 한문에 대단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혁신을 도모하던 시절이긴 했나보다. 그간의 획일적 선발 방식에 회의를 느꼈는지 필기시험을 폐지한다는 파격적 인사 정책을 내걸었다. 대신 ‘전 학년 학업성적’, ‘서클 활동’, ‘사회봉사 활동’, ‘외국어 및 컴퓨터 활용 능력’,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물론 앞서의 ‘한자 능력’도 포함)
근데 따지고 보면 이걸 요즘 말로 ‘스펙’이라고 한다. 단순히 시험을 잘 보는 인재상을 넘어 지금까지 쌓아온 ‘스펙’들을 면밀히 살펴 우수한 인재를 뽑겠다는 거다. 음... 혁신은 혁신이다. 20여년 후 도래할,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이 격화된 스펙 경쟁 시대를 미리 예견하고 인사정책에 도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근데 이거 진짜 혁신 맞나? 좀 애매하다.
바로 이 때! 명실상부하게 자타가 공인하는 진짜 새로운 형태의 채용방식이 등장한다. 국내 모든 경쟁기업을 이기고, 세계 최강의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그 그룹’. 바로 삼성이다.
◇재계 2위 삼성 - 혁신은 이런 것이다!...만 ‘갑분싸’를...
1989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 1995년 7월 26일은 (삼성에서) 학력의 장벽이 무너진 날이라고 자평했다.
오바 아니냐고?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형태의 대기업 채용 방식은 정말 이날을 기점으로 완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삼성은 대기업 채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일단 그 유명한 삼성의 직무적성검사, SSAT(SamSung Aptitude Test)가 이 때 만들어졌다. 이 때 즈음만 해도 상당수의 대기업은 추천제 채용을 실시하는 곳이 많았다. 명문 대학교에 일정 인원의 쿼터를 정하고, 교수 등의 추천을 받은 학생을 면접을 보게 해주는 채용방식이다. 때문에 학벌주의를 조장한다는 여론의 비판과, 과연 학벌과 기업 직무적성이 정비례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맞물리던 시절이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대기업이 자체적인 기준에 맞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맞춤형으로 제작한 직무적성검사를 삼성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HCAT, 포스코 PAT, 롯데 L TAB, 두산 DCAT, 한화 HAT…. 이 방식은 이제 국내 대기업 채용방식의 표준이 됐다.
이제 기본 스펙이 된 토익(TOEIC)과 토플(TOEFL)을 통한 영어 공인 자격 인증도 이 때 도입됐다. 만화와 드라마로 미디어믹스된 ‘미생’에서 나오는 프레젠테이션 면접도 마찬가지로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현재와 거의 유사한 형식의(물론 요구사항이 점차 늘긴 했지만) 공개채용 시스템을 완성한 것이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란 말이 있다. 그렇게 삼성은 국내 원톱의 대기업 그룹으로 거듭나게 됐다.
근데 삼성이 잘 나가다 말고 인사정책에서 ‘갑분싸’를 만든 적이 있다. 삼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2014년 1월 15일은 학력의 장벽을 다시 세운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년 만에 채용방식 변경으로 ‘총장 추천제’라는 채용 방식을 일부 도입한 것인데, 이는 각 대학교 별로 쿼터를 두어 학교별 우수인재를 선별적으로 채용하겠다는 방침이다. 쉽게 말해 예전 추천제 채용을 다시 일부 도입하겠다는 의미다.
기존 SSAT를 통한 ‘열린 채용’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계적으로 학벌주의로 회귀할 것을 우려한 여론의 반발은 국내 최고의 대기업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셌다. 결국 이 ‘총장 추천제’는 철회됐다. 대신, 연 20만 명에 달하는 시험 응시 인원을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서류를 통해 우선적으로 응시자를 추린 뒤, 직무적성검사를 실시하는 GSAT(Global Samsung Aptitude Test) 방식이 SSAT를 대체하게 된다.
이 당시 삼성을 무작정 학벌주의를 조장한 기업으로 비난하긴 어렵다. 익히 알려져 있듯 SSAT와 같은 시험 선발 방식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블라인드로 채용했더니 S·K·Y가 더 많아지더라’는 이미 너무 유명한 얘기고, ‘천거’와 ‘과거’ 중 어느 것이 효과적인 인재 선발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 중기부터 치열하게 논의하고도 결론을 내지 못 했던 사안이다. 이에 대한 현 시점까지의 사회적 합의는 ‘학벌주의로 흐를 가능성은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는 결론이고 삼성은 이를 간과했다.
현재 과다한 스펙경쟁과 불필요한 시험 비용 지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상황이다. 미래의 채용은 어떤 방식이 될까?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같은 시대적 병폐를 꿰뚫는 답안을 내놓는 기업이 '포스트 삼성'의 지위를 꿰찰지도 모를 일이다.
상술한 것 처럼, '인사는 만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