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이 존경을 담아 ‘여회청대(女懷淸臺)’를 내리다
단사 채굴과 수은, 그리고 진시황
파과부 청의 조상은 대대로 야금(冶金) 광산업, 특히 단사(丹砂) 채굴과 제련업을 하던 집안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단사의 생산을 장악하고 자원을 독점하였으며 스스로 가격을 정하여 판매하고 시장을 조종하였다. 그리하여 세금 외의 생산 이윤과 상업 이윤은 모조리 자기의 소득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단사는 주사(朱砂)라고도 하는데, 당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귀한 광산물이었다. 그것은 주색(朱色)의 안료나 진정제, 혹은 피부병 치료제 등 광범한 분야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더구나 황화수은(黃化水銀)인 단사를 가열하여 분해하면 수은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수은이야말로 고대 시대 사람들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신묘한 약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진귀한 물자였다.
500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춘추전국시대의 천하대란을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누구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했던 그가 평생 추구했던 것은 바로 불로장생(不老長生)이었다.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사람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그가 특별히 중시했던 것은 수은이었다. 지금도 진시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수은을 과도하게 복용하여 초래된 수은 중독으로 인한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어쨌든 전문가들에 의하면, 수은 애호가였던 진시황의 능인 진시황릉에는 총 100톤에 이르는 수은이 투입되었다. 여기에 파과부 청이 공급한 단사와 수은이 많았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평생 홀몸으로…‘정부(貞婦)’로 칭해
우리들로 하여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실은 파과부 청이 남편을 잃은 불행한 인생 역정을 겪고 난 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결연하게 가정과 사업이라는 두 가지 중책을 떠맡아 온 나라에서 그녀와 부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여중 호걸로 되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거상(巨商) 집안으로 시집을 갔지만,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와 남편을 연이어 잃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그녀는 재가하지 않은 채 가업을 이어받았고, 평생을 홀몸으로 살았다. 진시황은 그런 그녀를 절조가 있는 ‘정부(貞婦)’로 칭하면서 그녀를 존경하였다. 당시의 풍습으로 본다면,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뜬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다시 결혼을 하였다.
사실 진한(秦漢) 시대 그 무렵은 상당히 문란한 시대였다. 이를테면,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한나라 건국에 커다란 공을 세웠던 일등공신 진평(陳平)은 이미 다섯 번이나 결혼했던 여성의 여섯 번째 남편이었다. 한무제(漢武帝)의 어머니도 두 번 결혼했다. 그리고 진시황이 생모 조희(趙姬)와 여불위(呂不韋) 사이의 ‘사통(私通)’으로 태어난 사생아였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출생의 비밀’이다.
이렇게 문란하기 짝이 없었던 시대에서 본인이 일종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진시황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수절(守節)’한 그녀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진시황은 그녀를 빈객(賓客)으로 대우하였으며, 그녀를 위하여 특별히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짓도록 하였다. 당시에 어느 한 개인, 특히 한 여성을 위하여 대(臺)를 쌓고 공덕비를 세웠다는 것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조치가 아니었다.
진시황이 한 여성에게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그 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나아가 진시황만이 아니라 중국 역사상 황제가 한 여성에게 이렇게 표창하여 누대(樓臺)까지 설치해준 사례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전무후무, 이때가 유일하였다.
파촉에 거대한 ‘단사 제국(丹砂 帝國)’
그녀는 단지 한 사람의 여성에 불과했지만 조상이 남긴 가업을 능히 지켰고 나아가 더욱 키울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축적한 엄청난 재산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의 모욕이나 침범을 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자신만을 위하여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서 일을 하는 노비와 하인 그리고 각종 일꾼들과 호위 병사들까지 해서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녀의 사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그마치 1만 명이 넘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 모두를 잘 대접하고 그들의 생활을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폈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신선”이라고 불렀다.
당시 파촉 지방에서 그녀가 살았던 현(縣)의 인구는 5만 명이었는데, 그녀의 사업에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만 해도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그녀의 세력은 강력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그녀의 왕국은 가히 ‘단사 제국(丹砂 帝國)’이라고 불릴 만했다. 진시황이 그녀를 극진하게 대접해 주었던 이유 중에는 그녀의 배후에 존재했던 이러한 강력한 권위와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추론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진시황은 천하 통일을 이룬 뒤 가혹한 전제 정치를 펼쳤는데, 이를 위해 각지의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조치는 필수적 수순이었다. 이에 따라 각지의 귀족과 호족들은 타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중 총 12만 호가 진나라 수도인 함양으로 이주하였다. 파과부 청도 함양으로 이주하였다. 함양으로 이주한 그녀는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재산을 모아 영원한 영예를 얻다
사마천은 ‘화식열전’ 편에서 파과부 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파과부(巴寡婦) 청(淸)은 그 조상이 단사(丹沙)가 생산되는 광산을 발견하여 몇 대에 걸쳐 그 이익을 독점하여 재산이 너무 많아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청은 단지 한 사람의 과부에 불과했지만 조상이 남긴 가업을 능히 지킬 수 있었고, 재산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의 모욕이나 침범을 받지 않았다. 진시황은 그녀를 절조가 있는 정부(貞婦)로 여겨 그를 존경하고 빈객(賓客)으로 대우하였으며, 그녀를 위하여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짓도록 하였다. 청은 궁벽한 시골의 과부였지만 도리어 천자의 예우를 받아 이름을 천하에 떨쳤으니, 이는 실로 그 부유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파과부 청, 중국 최초의 여성 부호, 아니 어쩌면 세계 최초의 여성 부호일 수도 있는 그녀는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잘 관리함으로써 이렇게 영원한 영예를 얻었던 것이었다. 덧붙이자면, 그녀는 중국 정사(正史)에서 자신의 본명으로 기록된 최초의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