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계 신화’에서 ‘중견 감독’으로…총선 앞둔 개봉 “의도된 것 아니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는 2006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공연계 스테디셀러다. 2013년 한국 창작 뮤지컬로서는 최초로 중국에 라이선스를 수출했고, 동명의 영화는 공유, 임수정을 내세워 1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작품은 장유정 감독의 2003년 대학 졸업 작이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형제는 용감했다’, ‘그날들’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인근에서 장 감독을 만났다. 그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ㆍ폐막식 부감독을 맡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영화 ‘김종욱 찾기’, ‘부라더’ 이후 세 번째 영화 ‘정직한 후보’를 개봉했다.
“대학생 때부터 ‘영화광’이었어요. 연극원을 나왔는데, 복도만 지나면 영상원이었거든요. 수업을 많이 들을 수 있었죠. 변영주 감독님 수업도 들었어요. 졸업하면서는 공연과 영화 일을 동시에 시작했어요.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연출일을 하면 연봉을 500만 원도 안 되게 받았거든요. 그래도 글을 조금 쓴다고 ‘김종욱 찾기’란 작품도 냈네요. 잠이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조연출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은 평탄치 않았다. 장 감독은 ”나이는 먹었는데 영화는 잘되지 않으니 (영화는)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보다 했다”고 말했다. ‘김종욱 찾기’의 대박은 오히려 그를 움츠러들게 했다.
“제가 뮤지컬에서 어린 나이에, 제가 가진 그릇에 비해 너무 많은 촉망을 받은 거예요. 두려웠어요. ‘잘됐다! 마음대로 해야지!’ 할 수 없었거든요.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90석짜리 연우무대 극장에서 한 건데,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그대로 인도에 가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대극장 뮤지컬 제안들이 들어왔지만, 내실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소극장에서 연극만 했다. 그는 공연만 하다가 ‘짠!’ 나타난 캐릭터가 아니다. 시나리오도 몇 편이나 썼지만, 잘 안 됐다.
“사람 사는 게 고락(苦樂)이라고 하잖아요. 물론 ‘고’가 인정이 안 돼서 우울하고 힘들지만요. 오늘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어떤 작품이나 장르를 결정할 때 신중하게 하려고 해요. 영화만 한다, 공연을 다신 안 한다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날들’도 2012년 초연 때부터 계속했는 걸요.”
그는 세 번째 영화 필모그래피를 ‘코미디’로 택했다. 2018년 초여름 김홍백 홍필름 대표와 우연히 저녁을 먹다 ‘거짓말 못 하는 정치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게 계기가 됐다.
‘정직한 후보’는 4선에 도전하는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이 선거를 앞두고 겪는 소동을 담는다. 가장 중요한 줄기는 주상숙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상숙의 할머니(나문희)는 정직하지 못한 손녀를 보며 속을 태우다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빈다. “(상숙이가) 정직하게 살게 해달라”는 바람은 현실이 된다. 아무리 애써도 거짓말이 도저히 입에서 나오지 않는 주상숙은 ‘나는 서민의 일꾼’이라는 선거 문구를 ‘서민은 나의 일꾼’이라고 말한다.
장 감독은 “계급의 정복에서 오는 통쾌미가 담긴 영화”라고 설명했다.
“주상숙은 악역이에요. 할머니가 죽었다고 말하고, 또 가두고, 3선 의원이나 돼서 사람들과 짜고치고, 얼마나 나쁜가요. 그런데 아주 미우면 코미디가 형성될 수 없어요. 갑이면서도 동시에 을이어야 관객들은 공감하고 호감을 느낄 수 있죠. 계급적으론 ‘갑’인 국회의원이 시어머니와 남편에겐 ‘을’인 상황인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속마음을 터뜨리는 거죠.”
브라질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소원을 빈다는 설정 외엔 대부분 새롭게 해석했다.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남자였던 주인공은 ‘라미란’을 염두에 두고 여성으로 바꿨다.
“원작에선 당연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도 없었죠. 보통 원작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수위를 정하는데, 저희는 완전히 달라요. 코미디는 환경적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유럽 코미디가 한국에서 안 통할 수 있고, 한국 코미디가 일본에선 재미없을 수도 있어요.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요. 문화적, 사회적 코드를 얼마나 인지하느냐에 따라 훨씬 배가 될 수도 있고요.”
장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며 국회의원회관을 밥 먹듯 들락거렸다. 7개 정당의 보좌관ㆍ비서관ㆍ대변인 등을 만났다. 취재를 하며 김 보좌관, 박 비서관을 ‘김보’, ‘박비’라고 하는 것까지 세세하게 표시했다. 주상숙을 3선 의원으로 설정한 건 ‘3선 되면 지역구 안 가고, 4선 되면 의원회관도 안 간다’는 말을 모 보좌관에게 들어서다. 3선에서 4선으로 가는 타이밍을 그리면,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봤다.
특히 영화에는 당 대표의 지시에 따라 남의 차도 들이받는 ‘윤 보좌관’이란 캐릭터가 있다. 주변에선 장 감독에게 이 캐릭터에 대해 남성적이라고 묻지만, 그는 “취재 과정에서 만난 보좌관 때문에 여성으로 설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름 들으면 아실 만한 5선 이상 국회의원이 처음 의원 생활을 할 때부터 함께한 보좌관이 계세요. 인턴으로 시작하신 분인데, 지금은 50대 여성이시죠. 그분이 굉장히 베테랑이세요. 의원한테 ‘오늘 넥타이 이상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솔직한 분이에요. 근데 그분이 좋은 일만 하겠어요? 나쁜 일도 해야 할 때가 있겠죠. 그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니 ‘충분히 여자가 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극 중 주상숙을 상징하는 색은 ‘보라색’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특정 정당색이라며 영화에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 아니냐는 글도 올라온다.
“원내 정당에 있는 색을 다 뺐어요. 가장 좋은 색은 신호등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다음이 무지개색이죠. 딱 보면 알 수 있는 색깔이어야 했어요. 기존에 있던 색을 배제하면 쓸 색깔이 없더라고요. 보라색은 극단적인 색을 섞은 거예요. 2012년까지 보수당은 파란색이었어요. 보라색은 극단적인 색을 섞은 거죠. 그런데 그 의미가 또 ‘고귀함’이에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져가야 할 사람들의 기본 소양인 거잖아요. 무엇보다 라미란 배우한테 잘 어울렸고요.”
장 감독은 총선을 앞둔 개봉 시기에 대해서도 “의도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1월 초까지 후반 작업을 마쳤고, 바로 개봉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다만 1인 시위를 하는 ‘슬기 엄마’에게 주상숙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넣었다.
“저희 장르는 코미디예요. 위선적인 정치인을 보여줘서 국민이 분노하게 하려는 것보다 위트와 유머 코드로 풍자하는 방식을 취하죠. 하지만 정치인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선거와 상관 없이 고개 숙여서 사과하는 장면을 꼭 넣고 싶었어요. 정치를 소모시키지 않는 장면이랄까요. 주상숙이 자신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를 보면서 ‘너 왜 알려고 안 했어. 너 진짜 썩었니?’라고 말하는 대사도 있죠. 아무리 풍자라고 해도 너무 우습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제가 영화로 대단한 설파를 하거나 교조를 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뉘우치는 장면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뷰 말미, 장 감독은 취재를 하면서 만난 정치인이 영화를 보고 보낸 소감이 담긴 문자를 직접 읽었다.
“‘영화 보면서 많이 웃었다. 한편으론 많이 변한 게 없는지 반성했다. 제어판이 되어줘서 고맙다. 최소한 부끄럽겐 안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