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고의’, ‘과실’을 국가배상청구권 성립요건으로 정한 국가배상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재는 26일 A 씨 등이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대해 제기한 위헌소송에서 재판관 5대 3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소각하판결이 확정된 일부 청구인들의 심판청구는 재판의 전제성이 없어 각하했다.
이번 사건은 긴급조치 제1호나 제9호 위반으로 수사, 재판을 받은 당사자와 가족들이 청구한 28건이 병합됐다. 이들은 긴급조치 1호, 9호에 관해 위헌결정이 내려진 뒤 긴급조치 발령에 따른 수사와 재판, 그 과정에서의 가혹행위 등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민주화보상법상 생활 지원금 등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이 발생했다며 소를 각하했다. 나머지 청구인에 대해서는 국가배상법상 공무원의 고의나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이들은 국가배상법 제2조 1항 본문 중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부분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그러나 헌재는 “심판대상조항이 헌법상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헌재의 선례는 여전히 타당하고, 이 사건에서 선례를 변경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2015년 해당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재는 긴급조치로 인한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과거에 행해진 법 집행행위로 인해 사후에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면, 국가가 법 집행행위 자체를 꺼리는 등 소극적 행정으로 일관하거나 행정의 혼란을 초래해 국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국가의 행위로 인한 손해가 이 조항으로 구제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입법자가 별도의 입법을 통해 구제하면 된다”고 판시했다.
다만 김기영, 문형배, 이미선 재판관 등은 “불법행위를 직접 실행한 공무원은 국가가 교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한 지위에 있었고, 이로 인한 피해 역시 이례적으로 중대하다”며 “해당 조항은 개별 공무원의 고의, 과실을 요구해 국가배상청구가 현저히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공무원에 대한 제재 기능과 불법행위의 억제기능은 국가가 개별 공무원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상태에서 벌어진 경우에는 설득력이 떨어지고, 국가배상제도를 헌법으로 보장한 정신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