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1654~1722)는 재위 기간이 61년으로서 중국 황제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긴 황제이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했으나 영민했던 그는 당시 어린 황제를 경시하면서 권력을 남용하던 권신(權臣) 오배(鰲拜)를 교묘한 꾀로써 제거하였다. 여덟 살에 부친을 잃고 열 살에는 모친을 잃어 천애의 고아가 된 그는 몽골 출신 할머니 효장(孝莊) 황후의 섭정을 받았는데 중국어문, 만주어문 그리고 몽골어문의 3개 국어에 능통하였고 어릴 적부터 독서에 탐닉하였다.
그는 오삼계(吳三桂) 등 삼번(三藩)의 난을 진압하고 몽골족의 후예인 준갈국을 평정하였으며 타이완을 복속시키고 나아가 러시아의 침략을 격퇴시켰다. 강희제 시대의 청나라는 이미 서양식 대포를 보유하고 있어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고, 이로써 전통적으로 기병부대의 우세를 과시한 북방민족 몽골과 신흥 강국 러시아도 제압할 수 있었다. 러시아와의 두 차례 조약에 통하여 북방 국경도 확정하였는데, 오늘날의 중국 국경보다 훨씬 위쪽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유럽에는 러시아의 피터 대제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있었지만 강희제의 청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대국으로서 문화가 가장 번영하였고 영토가 가장 넓으며 국력이 가장 강성한 국가였다.
어느 학자도 따를 수 없었던 대학문가
열네 살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강희제는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어김없이 건청문(乾淸門) 앞에서 ‘어전청정(御前聽政)’을 시행하였다. ‘어전청정’은 최고 조정회의로서 백관들을 소집하여 국가 정사에 대한 보고와 의논, 결정을 하는 회의를 말한다. 북경의 겨울은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의 날씨이고 여름은 견디기 어려운 혹서기였지만, 강희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하루도 회의를 거르지 않았다.
강희제는 수십 년을 하루와 같이 독서와 학습에 열중하여 문자 그대로 대학문가(大學問家)가 되었고, 한족의 어느 학자도 그를 학문적 논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손수 수많은 중요 전적(典籍)을 편찬했는데,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청문감(淸文鑑)’ 등 그가 주관하여 편찬한 전적은 60여 종 2만 권에 이른다. 나아가 그는 대수(代數), 기하(幾何)나 물리, 천문, 지리, 의학 등 서방의 근대 자연과학 연구도 매진하였다. 심지어 곰을 자기가 직접 해부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강희기가격물편(康熙幾暇格物編)’과 같은 과학 서적을 직접 저술할 정도였다.
그는 한족 스승으로부터 사서오경의 유학 경전을 학습하는 동시에 만주족 스승으로부터 만주어문을 익히고 또 기마와 궁술을 단련하였다. 특히 궁술이 매우 뛰어나 백발백중의 신궁이었고, 토끼 사냥을 나가 하루에 300마리의 토끼를 활을 쏘아 잡을 정도였다.
백성이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강희제는 말했다. “국가의 재부는 백성으로부터 나오지만 민력은 한계가 있다. 명나라 말의 여러 황제를 보면 사치가 한도가 없어 궁중의 복식(服食)과 사관(寺觀)을 건축함에 움직일 때마다 수십만에 이른다. 우리 왕조는 질박함을 숭상하여 당시에 비하여 단지 100분의 1~2에 불과하다.”
강희제는 매번 순행할 때마다 수행 관리들에게 농가의 곡식을 밟지 말고 만일 도로가 좁으면 줄지어 가도록 하였다. 또 추수철에 순행하게 되면 말들이 곡식을 밟지 않도록 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엄히 다스리고 반드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는 언제나 근검절약했는데, 이는 그가 항상 안민(安民), 양민(養民) 그리고 휼민(恤民)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강희제가 즉위했을 때, 청나라는 아직 전국적으로 효과적인 통치를 하지 못했고 민족 간의 갈등은 여전히 첨예하였다. 강희제 초기에 변란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전쟁은 끊임이 없었으며 경제는 어렵고 궁핍하였다. 강희제는 안민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그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인식하였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상황은 명나라 말기 이래 토지가 황폐해지고 대규모의 유민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바꿔내기 위해 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민간 소유로 전환시키고 노예를 석방하였으며 세금을 경감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사농공상 관념 벗어나 상공업 발전시켜
특히 강희제는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관념에서 벗어나 상공업이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파악하였고, 상업이 발흥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관세 징수 칙례를 공포하여 과다하게 세금을 징수할 경우 상인이 고소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또 관리가 상인을 겸하거나 시장을 독점하는 행위를 금지하였고, 세금 징수가 부족한 경우 해당 관리에게 강등이나 파면의 처분을 내렸던 이전의 정책을 개선하여 실제 정황에 근거하여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무리한 징세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도량형을 통일하고 병사들의 상인 약탈 행위를 엄금하였다.
강희제가 시행했던 이러한 일련의 정책에 의해 농업과 상업이 상승 작용을 하며 발전하였다. 소주(蘇州) 지역의 경우 강희제 초기에 “6문(門)이 닫혀 성안에 죽은 자가 서로 베개를 베고 누울 정도”였는데, 강희제 중기에 이르러 “군성(群城)의 10만여 호가 불을 지폈다. 물자가 산 같이 쌓이고 행인이 물 흐르듯 많았으며 배들이 집결하고 물자와 상인들이 운집하였다.”
한편 명나라 말기 이후 왜구의 창궐로 인하여 중앙정부는 오랫동안 바다를 폐쇄하는 정책을 시행해왔다. 강희제는 만년에 바다의 해금(解禁) 조치를 취하여 무역을 허가하였고 광산업 개발도 허용하였다.
이렇게 ‘경제’와 ‘정치’의 핵심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발전시킨 강희제가 있음으로써 청나라는 부국강병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 힘 바쳐”
강희제 47년(1717년), 그는 황자들과 백관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발표했던 ‘상유(上諭)’에서 이렇게 술회하였다.
“짐은 항상 마음이 절실하여 근면하고 조심스러웠으며 한가롭게 쉬지 않았고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수십 년 이래 하루 같이 온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이를 어찌 ‘노고(勞苦)’라는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옛날 제왕 가운데 혹 수명이 길지 못했던 경우에 대하여, 사론(史論)에서 대부분 방탕하고 주색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모두 서생들이 훌륭한 군주에 대해서도 반드시 흠을 들춰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짐이 전대(前代) 제왕을 대신하여 말하자면 모두 천하의 일이 너무 번잡하여 힘들고 고달픈 바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제갈량은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 바쳐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다(국궁진췌 사이후이, 鞠躬盡瘁 死而後已)’고 하였는데, 남의 신하된 자로서 이러한 사람은 오직 제갈량밖에 없다. 그러나 제왕의 짐은 너무 무겁고 벗어날 수도 없다. 어찌 신하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군주는 원래 편안히 쉬는 바가 없고 물러가 자취를 감출 수도 없으니 실로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 바쳐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