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악랄한 운동가, 괴물…악명높은 RBG. 영화 속 악당의 수식어 같지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미 전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1833년 3월 15일~2020년 9월 18일)를 따라다니던 말이다. 루스 긴즈버그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평생을 양성평등과 소수자 인권에 힘써왔다. 변호사 시절부터 여성 인권사에 남을 만한 굵직한 소송들을 이끌었으며, 연방 대법관이 된 후에도 양성평등과 소수자를 위한 판결을 내렸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RBG, 2018)는 이러한 그의 인생 발자취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 제목 '나는 반대한다'는 루스 긴즈버그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대법원이 보수적인 판결을 내릴 때마다 루스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을 내며 “나는 반대한다(I Dissent)”라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의 목소리에 미국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그를 래퍼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에 빗대 '악명높은 RBG'라고 부르며, 그의 얼굴이 담긴 티셔츠와 머그잔을 사용했다. 그의 얼굴을 타투로 새긴 젊은이도 있다.
대법관 시절 내린 대표적인 판결 중 하나는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을 탄생시킨 2007년 재판이다. 타이어 공장 노동자 릴리 레드베터는 남녀 임금 차별에 항의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법률상 이의 제기 시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임금 보상 요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루스 긴즈버그는 반대 의견을 통해 "릴리가 소송을 제기할 만큼 임금 차별을 일찍 알 수 없었고, 좀 더 일찍 알았더라도 고용주는 분명 레드베터에게 남성 동료보다 임금을 덜 받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그의 소수의견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 의회는 소송 시점 제한을 완화한 공정임금법을 통과시켰다.
루스 긴즈버그가 양성평등을 위해 싸우게 된 건, 여성 법률가이자 유대인으로서 세상의 벽을 마주한 경험 때문이었다. 루스 긴즈버그는 1956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당시 전체 로스쿨 학생 552명 중 여학생은 고작 9명이었다. 여학생들은 로스쿨 시절 내내 각종 차별을 겪으며, "남자들의 기회를 뺏었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루스 긴즈버그는 남편 때문에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며 1959년 콜롬비아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던 그였지만, 뉴욕 어느 로펌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은 루스 긴즈버그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생의 과업을 알려줬다.
다만,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재 그의 후임이 미 대선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대법관을 보수 성향으로 채우길 원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후임을 지체 없이 지명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미국 연방 대법원은 대법관 9명 중 보수 성향 5명과 루스 긴즈버그를 포함해 진보 성향 4명으로 이뤄져 있다.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대법관은 모두 여성이지만 보수 성향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거나 낙태 반대론자다.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온 루스 긴즈버그의 소송과 판결은 대부분 여성의 경제력과 성취와 관련 있다. 1973년 처음으로 대법원에 변론한 성차별 사건은 기혼 남성 공군에게 주어진 주택 수당을 받지 못한 기혼 여성 공군 소위의 소송이었다. 1996년에는 버지니아군사대학이 남성 생도들만 뽑는 것에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긴즈버그는 판결문에서 “여성의 뜻과 성취와 참여는 제한될 수 없고, 여성도 능력에 근거해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루스 긴즈버그는 2002년 5월 브라운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젊은이들에게 후세와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연설에서 "삶의 길을 갈 때 발자국을 남겨라. 나를 위해 길을 닦은 사람들이 있었듯이 내 뒤를 따라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후세의 건강과 안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라"라고 말했다. OECD 국가 중 가장 큰 남녀 임금 격차를 가진 우리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