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을 넘어서...남유럽, “이번 대응 강력해야” 대규모 지원 요청…2011 유럽재정위기 교훈으로 포퓰리즘 차단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유럽발 재정위기까지 연이어 치명타를 맞은 유럽에선 포퓰리즘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 증거는 7월 하순 타결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경제회복기금 조성 협상 과정에서 확인됐다.
이 경제회복기금은 당초 유럽연합(EU) 정상들이 2일간 회의 후 합의안을 내놓을 예정이었으나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5일간의 마라톤 협상으로 이어졌다. EU 정상들이 마라톤 협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상지원의 비중을 줄인 건 포퓰리스트들의 앓는 소리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EU가 합의한 경제회복기금의 규모는 7500억 유로(약 1045조 원)다. 이 중 3900억 유로는 ‘상환의무가 없는 보조금’으로 지급되고, 3600억 유로는 ‘저금리 대출’로 제공된다. 당초 EU 집행위원회(EC)는 5000억 유로의 상환 의무 없는 보조금을 제안했지만, 재정적 규율을 중시하는 이른바 ‘검소한 4개국’이 반발해 협상에 난항을 겪었다.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는 보조금 축소를 요구하며 “기금 지원에는 노동시장과 경제 개혁 등 조건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도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등 이른바 ‘남유럽 돼지들(PIIGS)’은 대규모 무상지원을 요구했다. EU의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독일 국내총생산(GDP)은 1분기보다 9.7% 감소한 반면, 이탈리아는 15.8%, 스페인은 16.9% 각각 급감했다. 특히 남유럽 국가는 관광 산업으로 큰 이익을 얻어온 터라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컸다. 이탈리아의 관광사업공사(ENIT)는 5~10월 이탈리아로 오는 미국인 여행자가 4분의 1 수준까지 감소할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인은 지난해 이탈리아로 온 관광객 중 1인당 지출이 가장 많은 집단으로, 총 55억 유로를 지출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와 안토니오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는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EC가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규모를 축소한다면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대응은 강력한 정책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콘테 총리는 이어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와 회담을 하고 검소한 4개국을 직접 방문해 기금 조성에서 보조금의 비율을 늘리고 저금리 대출 규모를 줄이는 방안을 협상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2011년 유럽 재정위기의 악몽이 선심성 기금 조성을 막는 방패 노릇을 했다. 당시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재정적자가 심각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2009년 그리스의 재정 적자는 GDP 대비 12.7%에 달했을 정도다. EU는 이들 국가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결속력이 오히려 약화하며 “유로존은 출구가 없이 불타는 건물”이라는 혹평까지 들어야 했다.
EU는 유럽 재정위기를 반면교사, 무턱대고 남유럽에 지원금을 쏟아붓지 않았다. 검소한 4개국을 배려하는 한편 지원 대상국으로부터 경제 회생 계획을 받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탈리아는 약 820억 유로의 보조금과 1270억 유로에 달하는 저리 대출을 받아 경제회복기금의 최대 수혜국이 됐다. 스페인은 773억 유로를 받으며 그 뒤를 따랐다. 대신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은 EU 정기예산에서 현금 환급을 받게 된다. 이들 국가가 7년간 받게 되는 환급액은 528억 유로로 전해졌다. 또 기금을 받아가는 국가는 2021~2023년 경제 회복 계획안을 제출해야 한다. 더컨버세이션은 이번 합의를 두고 “경제회복기금의 요점은 부유한 북유럽 국가들이 가난한 남유럽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다”며 “EC의 제도적 리더십과 유럽중앙은행(ECB)의 협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유럽이 남북으로 나뉘어 협상에 임했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중재 역할을 하며 결속을 과시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6월 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며 “기다림이 일을 더 쉽게 만들지는 않는다”며 “7월에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검소한 4개국에 “그들은 유로존의 순 수혜자”라며 “대출보다는 보조금이 경제회복기금의 핵심이어야 한다”고 합의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메르켈 총리 역시 “회복기금은 규모가 커야 한다”며 “유럽이 어려운 시기에 단결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강력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