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주영 20주기] "나는 단지 부유한 노동자…민간주도형 경제가 중요"

입력 2021-03-1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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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없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성공"…학교 구성원과 함께 완성한 창학정신 기념비

“종교에는 기적이 있어도 기업에는 기적이 없다.
일하는 사람의 피와 결실,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갖고 추진한 결과일 뿐이다.”

고(故) 아산 정주영 회장이 자주 인용한 말이다. 그는 항상 꾸준한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간에 알려진 그의 이미지는 ‘성공을 거듭한 신화적인 기업인’이지만, 사실 정 회장은 인간적이고 소신 있는 모습까지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중공업에서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꾸준함 잊지 않은 ‘노력형’ 인간=“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 부자가 되셨어요?”

정 회장이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강연을 마친 뒤 받은 질문이다. 교육에 관심이 많던 그는 초등학교 어머니회에서 초청해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참석하려 애썼다. 정 회장은 웃음을 머금은 채 학생에게 답했다.

“등산해 본 적이 있어요? 높은 산을 오를 때 산꼭대기를 바라보며 오르면 등산하기가 힘들어지기만 해요. 한 발짝 한 발짝 꾸준히 올라가면 결국은 정상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도 그때그때 최선을 다한다는 신조로 살아오다 보니까 조금 부자가 됐어요. 학생도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가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에요”.

꾸준한 노력을 중요시한 정 회장의 생각이 드러나는 말이다. 원대한 목표부터 세우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 회장이 경험한 성공의 비결인 셈이다.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하는 아산. ‘현장 근로자와 한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아산은 직원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밥을 먹고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것은 물론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사원들과 씨름을 하기를 즐겼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소통하며 사람을 아낀 ‘어른’=정 회장은 어떤 상대와도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는 어른이었다.

그는 자신을 “성공한 기업가가 아닌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표현하며 사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직원들과 팔씨름, 배구 등을 함께 했고, 창사 이래 매년 개최한 신입사원 수련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젊은 사원들과 씨름을 했다. 술자리에서는 20대들이 즐기는 최신 노래를 배워와 부르며 젊은 사원들을 놀라게 했다.

“노동조합은 있어야 합니다. 중역들이 근로자의 고충을 다 알 수가 없으므로 근로자들은 노조를 만들어 자신의 환경, 고충을 회사에 전달해야 해요. 모든 회사가 노조를 결성하고, 노조가 건전하게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 현대의 기본 방침입니다”.

1989년 현대중공업 사내 훈시에서 나온 정 회장의 발언이다.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당시 재계 분위기와 상반된 태도다. 정 회장은 노동자에게도 애정을 갖고 현장의 정서와 요구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정 회장의 모습은 현대고등학교가 창학정신 기념비를 세울 당시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현대고가 새로 제정한 창학정신 전문을 돌에 새기려 할 때, 정 회장은 자신을 포함한 학교 구성원이 한 단어씩 나눠 적어보자고 했다.

“젊은 시절, 어느 학교 공사장에서 돌을 지고 나르며 바라 본 학생들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에게 한없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 이루지 못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여기에 배움의 주춧돌을 놓게 하니, 비로소 젊은 날 나의 꿈 하나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향학에 불타는 젋은이들이 이 배움의 터전에서 담담한 마음을 갖고 개척의 정신과 창조의 능력을 갈고 닦아 세계의 빛이 되기를 바란다”.

현대고 창학정신비는 정 회장부터 교사, 직원, 청소부, 수위까지 총 58명이 나눠 적은 탓에 삐뚤빼뚤하다. 하지만, 이 비석이야말로 조직사회의 화합과 협력, 모든 구성원을 소중히 여긴 정 회장의 인품을 담고 있다.

▲현대고등학교 창학정신이 새겨진 비석. (출처=현대고 SNS 페이지)

◇푸대접받아도 스텔라 애용한 ‘현대인’=정 회장은 다른 기업 회장들처럼 수입차를 타지 않고 반드시 현대차를 이용했다. 이 때문에 행사에서 푸대접을 받는 일도 있었다.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재계 행사 때의 일이다. 행사가 끝난 뒤 타사 회장들은 건물 1층에서 각자의 수입차를 타고 곧바로 빠져나갔다. 이어 정 회장을 태울 현대차 '스텔라'가 로비 앞에 멈췄는데, 건물 관리인은 기사에게 “로비 앞에 차를 대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수입차가 아닌 국산차 '스텔라'가 건물 바로 앞에 멈춰 서자 차별 대우한 것이다. 정 회장은 별말 없이 차를 타고 떠났다. 나중에야 건물 관리인은 차에 탄 사람이 현대의 정 회장이라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정 회장은 평소 “내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돈만이 내 돈이고 집으로 가져가는 생활비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하며, 돈이란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이상의 것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는 소신을 밝히곤 했다.

실제로 정 회장의 자택에는 값비싼 물건이 많지 않아 도둑들이 별 소득 없이 떠나는 일도 있었다. 1980년 여름, 정 회장의 청운동 자택에 도둑이 들었다. 이들은 정 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에게 달러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변 여사는 “나는 달러라는 게 있다는 말만 들었지, 평생 구경 한 번 못 했다”라며 아들(정몽준)의 결혼 패물로 사놓은 시계와 월급 200만 원을 건넸다.

숨겨진 금고나 값비싼 물건을 찾으며 집안을 뒤지던 도둑들은 집을 떠나며 이런 말을 남겼다. “현대 회장 집이 뭐 이래!”

▲198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에 참석한 정주영 회장. 정 회장은 제13대~17대(1977년 4월~1987년 2월)까지 10년 동안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재계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할 말은 하는 당당한 ‘기업인’=정 회장은 정권의 ‘예스맨(Yes Man)’이 아니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도 부당한 지시에는 당당히 맞섰다.

정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은 1977년, 박정희 정권은 법인세 개편을 추진했다. 최고소득세액 세율이 70%로 치솟고, 기타 세금이 추가되면 기업활동으로 벌어들인 소득의 89%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예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소작을 해도 30%는 소작인 몫이 되는데, 자기의 책임과 노력으로 자본을 동원해 기업 활동한 산물의 89%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 오늘의 세제라면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아닌가?”

정 회장은 이같이 주장하며 재계와 조직적인 저항운동에 나섰다. 매일 같이 경제4단체와 함께 정부, 총리, 국회 등을 방문해 설득했다. 이후 집권한 신군부는 그의 조직력을 우려해 전경련 회장을 교체하려 했지만, 정 회장은 “전경련 회장은 회원이 뽑는 것”이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기업 활동에 사사건건 간섭하려 한 정부를 비판하며 ‘민간주도형 경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업종의 선택, 투자 여부, 가격 산정은 기업의 판단에 맡기고 정부는 경제의 큰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기업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민간주도형 경제로 가려면 기업도 함께 변해야 한다. 자율적인 활동 여건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에 매달리는 이율배반적인 형태가 적지 않다”라며 “기업은 독자적인 판단 아래 시장에 참여해야 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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