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미술 시간은 수학·영어 같은 숨 막히는 과목들 사이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작은 틈새였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미술 시간은 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연필을 쥐고 밑그림을 그릴 때부터 생각과는 다른 선들이 삐져나왔다. 색칠하고자 붓을 쥐면 이리저리 휘는 붓 때문에 그림은 더 중구난방이 됐다.
요즘 방구석 취미로 인기 많은 '피포 페인팅'은 그림 그릴 때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준다. 피포 페인팅은 미리 그려진 도안에 숫자에 맞는 물감을 칠하는 DIY 미술 상품이다. 2006년 세상에 첫선을 보였는데 최근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방구석 취미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고흐·마티스 등 유명 명화부터 디즈니, 해리포터까지 도안이 매우 다양하다. 내가 원하는 도안이 있으면 직접 업체에 의뢰할 수도 있다.
자신을 '취미 부자'라고 소개한 직장인 최아리 씨는 '쉽고 단순함'을 피포 페인팅의 매력으로 꼽았다. "학창시절 미술 실기 수업으로 진행했던 아크릴화가 정말 재밌었는데, 맨 처음 시작인 밑그림 그리기에서 항상 실패하고 좌절했다. 그런데 피포 페인팅은 이미 밑그림이 있고 색이 정해져 있는 부분에 단순히 맞춰 칠하면 되니 훨씬 단순하고 쉽다. 또 완성되면 어디걸기 애매한 작품이 아닌 그럴듯한 완성작이 나오는 것도 큰 매력이다."
피포 페인팅은 물감을 색에 맞춰 칠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컬러링북과 비슷하다. 하지만 같은 색이라도 물을 어느 정도 섞어주느냐에 따라 다른 질감이 표현된다. 물을 조금 쓰고 두텁게 물감을 올리면 나이프 화 느낌이 나고, 물을 많이 섞어 얇게 표현하면 수채화 느낌이 난다.
미리 정해진 도안과 색깔 안에서도 어떻게 색을 쌓아 올리냐에 따라 충분히 나만의 다른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 또 주어진 색을 온전히 사용하기보다 서로 다른 색을 섞거나 흰색을 섞으면 좀 더 다채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다만 도안 선을 가려야 하므로 너무 얇게 색을 올리면 안 된다.
처음 피포 페인팅에 도전한다면 캔버스 크기가 작은 것부터 시작하길 추천한다. 피포 페인팅은 작게는 가로 10cm부터 크게 100cm까지 다양한 사이즈와 도안이 있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건 걸기도 그리기에도 좋은 40x50cm 사이즈다. 하지만 크기는 같아도 도안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로 나뉜다.
처음부터 너무 세세한 도안에 도전하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포기하기 쉽다. 직장인 최혜림 씨는 2016년 한 달 동안 그렸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완성하지 못하고 벌써 5년째 방치하고 있다. 세세한 면적을 칠하다가 화가 나서 그냥 포기했다고. 그렇게 혜림 씨의 캔버스는 별이 빛나기는커녕 먼지만 쌓이고 있다.
최아리 씨는 피포 페인팅을 할 때 "허리를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아리 씨는 "어떤 자세로 시작하든 오랜 시간 앉아 집중하다가 나중에 일어나면 허리가 지끈거리더라"고 했다. 이때 이젤을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전문가들이 쓰는 튼튼한 이젤은 가격이 상당하지만, 다이소에서 3000원이면 구매할 수 있다. 아울러, 물감이 마르지 않도록 뚜껑을 제때 닫고 붓은 사용 후 그때 그때 씻도록 한다.
심리학에서는 미술을 통해 마음의 문제를 표현하고 심리적인 어려움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이 무의식중에 색에 반응하고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짜증스럽다가도 푸른 하늘이나 화사한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도안에 맞춰 색을 칠하는 피포 페인팅 역시 마음 가는 대로 색을 칠하다 보면 좋은 기분을 가져다준다.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아도 숨 쉴 여유를 줬던 어린 시절 미술 시간처럼 말이다. 코로나19로 숨 막히는 일상이 내 마음을 괴롭힐 때, 붓을 한번 잡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