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을 품은 섬세한 면에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차가운 맛.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한 채 깊은 맛을 내는 육수, 겹겹이 정갈하게 올려진 고명까지. 첫맛은 밍밍하고 낯설지만, 한번 맛 들이면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매력의 음식. 바로 냉면이다.
이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을 대해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KBS 다큐인사이트가 제작한 2부작 푸드 인문 다큐 '냉면 랩소디'다. 여름마다 생각나는 시원한 음식 담론을 넘어, 한국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각 지역 냉면의 유래와 냉면을 둘러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미 두 차례 전파를 타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현재 넷플릭스와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흔히 냉면의 역사라 하면 실향민들을 먼저 떠올린다. 사실 냉면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랑받는 음식이었다. 냉면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조선 중기 문인 장유가 쓴 '계곡집'(1643)에 실린 '자장냉면'이라는 시다. '옥가루인듯 눈꽃이 가닥마다 서린' 차가운 국수의 맛을 예찬한 시다.
냉면의 조리법을 설명한 최초의 기록은 1809년 빙허각 이 씨가 적은 '규합총서'다. 늦가을에 딴 오이를 재에 묻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정보부터 동치미 담그는 법, 고명 올리는 법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냉면의 출발점이 추운 겨울 동치미라는 분석이 많은데, 규합총서에는 이 냉면을 탄생시킨 옛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냉면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성장했다. 상품 화폐 경제가 커가며 식문화도 발전했다. 지금은 냉면하면 '평냉'과 '함냉'을 떠올리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냉면하면 평양과 진주였다. 모두 물산이 풍부하고 교방문화가 발달한 도시였다.
조선 후기 냉면 거리가 있을 정도로 냉면을 많이 먹었던 평양은 고려 시대부터 주요 거점 도시로 기능했다. 평양은 사신이 머무는 통로로 물산이 풍부했으며,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도 도시 외곽에서 많이 자랐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평안감사는 당대 가장 '끗발'있는 관직이었다.
북으로 국경이 맞닿아있는 평안도와 함경도는 조세를 중앙으로 상납하지 않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이를 관향곡(管餉穀·관향사가 관장하는 군량미)이라 했는데, 덕분에 평안감사는 다른 지역 감사보다 훨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평양에는 마시고 즐기는 교방문화가 발달했다. 전국 기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평양으로 모여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냉면이 시원한 여름 별미로 꼽히지만, 당시는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 하며 밤늦게 술을 마신 뒤 마무리로 즐기는 음식이었다. 교방문화와 함께 냉면이 성장한 이유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진주 역시 예부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했다. 경상남도의 조세를 모아 바다를 통해 서울까지 운반하는 가산창(駕山倉)이 있어 일찍이 장시(場市)가 발달했다. 19세기 초 진주에서 열리는 장시만 해도 13개에 달했으며, 관아 기생들도 냉면을 배달 시켜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
냉면은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는 1768년(영조 44년) 과거 시험을 본 다음 날 일행들과 함께 냉면을 시켜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는 순조가 즉위 초 신하들과 달구경을 갔다가 냉면을 사 오라고 시킨 기록도 있다.
순조 대는 세도 정치가 득세해 조선의 국운이 점차 기울던 시기였으나, 전국에 약 1600여 개의 장시가 성행할 정도로 경제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의 냉면에도 지금의 성장한 경제와 식문화가 녹아있다. '물냉'vs'비냉, '회냉'vs'육냉','평냉'vs'함냉' 같은 냉면 논쟁은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다양하게 뻗어 나간 식문화를 보여준다. 사실 이토록 다양한 변주의 출발점에는 전쟁이란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 전쟁 이후, 이북에서 건너온 많은 이들이 냉면을 각 지역에 전파하며 그 지역에서 찾기 쉬운 재료로 냉면을 만들었다. 까나리 액젓을 사용한 백령도 냉면, 미군의 원조 밀가루에서 탄생한 부산 밀면, 함흥의 가자미를 명태로 바꾼 속초 회냉면 등이다.
오늘날 냉면은 아픈 근대사를 딛고 더 멀리 뻗어 나가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냉면 랩소디'의 프리젠터 백종원은 침체된 제주의 마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냉면 가게를 차린다. 지역에서 나는 메밀, 무, 돼지고기, 양배추를 재료로 삼았다. 발달하는 경제를 발판으로 성장한 냉면 한 그릇은 이제 지역의 경제를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