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정의당 의원
과잉진압ㆍ인권침해 사과하고도 소송은 계속 끌고가
손배액 지연이자 매일 62만 원씩 쌓여
10년 넘게 지속된 사회적 갈등
"소 취하, 국가 폭력이 빼앗은 안녕 돌려주는 시작"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쌍용차 사태 이후 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 취하를 촉구하는 국회 결의안(쌍용차 결의안)이 나오기까지 12년이 흘렀습니다. 노동자들과 가족분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8월 마지막 날 국회 본회의장,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연단에 섰다. 이날 거대 양당 입법 독주로 쌓인 46개 안건 중 마지막이 그의 차례였다. 그는 ‘쌍용자동차 국가손해배상 사건 소 취하 촉구 결의안’ 취지를 한 글자씩 소중히 읽어 내려갔다. “정부로 하여금 국가폭력 피해자들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실추된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촉구하며….”
전광판에 ‘찬성’을 뜻하는 초록색 불이 하나둘 들어와도 그는 좀처럼 긴장을 내려놓지 못했다. 길어진 본회의에 의원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의결정족수 미달로 자동부결될 수 있다. 어느덧 그의 눈은 ‘찬성’보다 ‘재적수’에 꽂혀 있었다.
이 의원은 “이날 생각하면 아직도 콩닥콩닥해요. 이날 유독 많은 안건에 심지어 마지막 순서. 하나둘 자리가 비워지기 시작하는데, ‘아, 반대로 부결 나는 게 아니라 정족수가 문제가 되겠구나’ 싶은 거예요. 누가 나가는지 애타게 쳐다보니 눈이 마주친 한 의원은 일어섰다 다시 앉기도 했네요. 그렇게 눈빛 교환한 분도 여럿 되네요(웃음)”라고 회상했다.
재석 153인 중 찬성 106인, 반대 40인, 기권 7인. 가결이 선포됐다. 이 의원은 비로소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를 향해 동료 의원들이 “고생했다”는 말을 건넸다. 하루 전 언론중재법 개정을 두고 여야가 본회의를 파행한 상황에서도 국가 폭력을 멈추자는 결의안 처리에 견해차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가결되자마자 그는 김득중 쌍용차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합니다.”
이 의원은 “사실 ‘반대’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이미 공동발의자만 299명 중 117명이었거든요. 제가 직접 여야 의원들 직접 만나면서 설득한 만큼 자신 있었죠. 그럼에도 47명의 반대나 기권이 있다는 점은 제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더 찾아가서 얘기할걸. 당시 행안위에 상정된 법안들을 보면, 5·18이나 여순사건과 같이 국가 폭력 치유에 관한 특별법도 올라온 만큼 기대도 컸어요. 하지만 정작 상임위 문턱을 넘는 데까지가 1년이 걸렸어요. 높은 문턱에 왜 우리는 정작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국가 폭력을 치유하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건 명백한 ‘국가 폭력’입니다. 경찰청 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와 결과도 있고 전임 경찰청장까지도 사과한 상황이에요.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부당한 강제 진압 책임에 따른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은 정당성이 결여됐다고도 판단했어요. 취하를 할 수 있는 근거와 상황이 충분한 데도 경찰은 (소송을) 철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경찰 태도를 보면서 ‘국회가 나서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라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이 의원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취하하라는 내용을 담아 결의안을 만들었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기보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나서 달라는 취지에서다. 그는 소송 취하뿐만 아니라 정부가 국가폭력 피해자인 쌍용차 노동자·가족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강제 진압 현장에 투입된 경찰들의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1년 넘게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자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과 행안위 여야 간사, 여당 정책위의장과의 간담회 자리도 만들어가면서 직접 설득했다.
결의안이 본회의 통과된 날, 그간 이 의원의 의정활동을 지켜본 윤지선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활동가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그는 “개인적으로 소수정당에서 대표 발의한 안건이 상임위에 상정되고 통과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보게 된 기회였다. 이은주 의원은 여야 의원들 한 명 한 명 만나 설득했다고 들었다. 실제 자세를 낮추고 발로 뛰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잔상처럼 남아 있다”고 밝혔다.
20억 원이 넘는 국가 손해배상액은 국가폭력의 연장선이 됐다. 지금도 이들이 갚아야 할 지연이자는 매일 62만 원씩 쌓인다. 심적 압박을 느낀 30명의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이 생을 마감하는 비극으로도 이어졌다. 지난해 7월,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김창룡 경찰청장 인사청문회에서 “10년 가까이 이어지는 소송으로 인해 해고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계속 복기해야 하고, 그에 따른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이것도 보이지 않는 국가 폭력”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어느 순간부터 아침마다 신문 펴기가 겁이 나는 날이 오더라고요. ‘자살 도미노’ 현상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이 우리 곁을 떠났는데도 아직도 해결되고 있지 않는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 살아남은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결의안 통과가 곧 쌍용차 소송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정치권과 법조계가 이번 결의안을 주목한 이유는 국가가 제기한 소송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이투데이가 이 의원을 만난 지난달 30일, 쌍용자동차가 노조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선고가 연기됐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날 대법원이 예고 없이 이례적으로 선고를 미루자 일각에선 사법부가 이번 국회 결의안을 고려해 숙고에 들어갔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이 의원은 “경찰청은 이번에 통과된 결의안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의안은 ‘경찰은 가해자, 노동자는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쌍용차를 둘러싸고 10년 넘게 지속된 사회적 갈등을 매듭짓자는 메시지입니다. 노동자, 경찰, 시민사회가 화해하기 위해선 국가의 소 취하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 국회가 이번 결의안을 통해 확인시킨 만큼 정부와 경찰도 합당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때입니다”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