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미국 소녀 클레어(리브 휴슨)는 한국 드라마에 빠져있는 K-드라마 덕후다. 틈만 나면 드라마 정주행을 달려 아버지가 “사람들과 대화는 하니?”라고 물을 정도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클레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에 강도가 든다. 절체절명의 위험한 순간, 클레어는 알 수 없는 빛에 의해 드라마를 보던 핸드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눈을 떠보니 클레어가 떨어진 곳은 서울 도심 한복판. 클레어가 열렬하게 본 드라마 ‘사랑의 맛’ 속 세계다.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남자주인공은 분노에 찬 순간 샤워를 하며, 갈등의 순간 김치 싸대기가 등장한다. K-드라마 덕후인 미국 소녀 클레어가 한국드라마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가며 벌어진 이야기를 다룬 13부작 시리즈 ‘드라마 월드’(Drama world, 2021)다.
드라마 월드는 한국 드라마 특유의 ‘클리셰’로 세상이 작동한다. 재벌 2세, 의문의 사고, 가업의 위기,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까지. 한국인이라면 친숙한 서사가 가득하다. 클레어는 드라마월드에서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된다. 그는 자신이 아는 클리셰를 총동원해 드라마 속 사랑이 이뤄지도록 고군분투한다.
작품은 실제 한국 드라마 마니아인 미국인 크리스 마틴 감독이 연출했다. 미국 소녀가 우당탕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에 한국적 클리셰를 절묘하게 버무렸다. 한국 드라마가 배경인 미국 드라마인 셈이다. 하지원, 헨리 등 한국 스타들도 대거 출연한다.
프랑스어로 진부한 표현, 고정관념을 뜻하는 클리셰(Cliche)는 대개 부정적으로 여겨지나 사실 콘텐츠에서는 필수 요소다. 소비자들이 새로운 것을 바라면서도 익숙한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완전히 색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잘 알고 있는 친숙한 이야기가 조금씩 변주되는 걸 좋아한다. 이 법칙은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 예능,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에 해당된다.
클리셰의 전형성은 문화와 시대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한국 드라마의 부정적 클리셰로 여겨졌던 ‘신파’는 최근 오징어 게임에서 해외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한국에서 신파 범벅이라는 평을 받은 오징어 게임 6화의 구슬치기 장면은 오히려 외국에서 반응이 터졌다. 세계 각국에서 호평이 이어졌고 해외 유튜버들은 앞다퉈 ‘리액션 비디오’를 만들며 눈물 콧물 쏟는 모습을 공유했다.
이야기의 힘은 지갑을 열었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CEO는 3분기 실적발표회 영상에서 오징어 게임의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등장했다.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6% 늘어난 74억 8000만 달러. 기대 이상의 수치였다. 로이터,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은 넷플릭스의 실적 개선 비결로 일제히 오징어 게임의 흥행을 꼽았다.
넷플릭스는 창작자에게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제공하되, 부가가치 창출의 핵심인 지식재산권(IP)을 가져간다. 이 때문에 한국이 글로벌 OTT의 하청 공장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안정적인 제작비 확보와 실험적인 작품을 원하는 중소 제작사 입장에서는 글로벌 OTT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도 10년 전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나 국내 투자자가 없어 넷플릭스의 투자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 당분간 글로벌 OTT는 한국 콘텐츠 시장에 계속 문을 두드릴 전망이다. 글로벌 OTT에 한국 콘텐츠는 놓칠 수 없는 고효율 상품이기 때문이다. 가성비 흐르는 제작비는 결국 낮은 인건비에서 기인한다. 넷플릭스가 들어오며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이 그나마 나아졌다고 하지만, 이는 한국 콘텐츠 산업이 그동안 얼마나 낮은 인건비로 사람을 갈아가며 성장했는지 드러낸다.
우리가 보고 즐긴 이야기는 누군가 흘린 땀과 노력의 산물이다. 그 노력의 대가가 정당하게 주어질 수 있도록 더 나은 제작 환경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진짜 드라마 월드는 판타지 세계의 조력자가 아닌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창작자’에 의해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