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체 대부분 민감한 정보는 제외
차량용 반도체 부족 해결 안 될 시 추가 요구 가능성
무리한 요구 시 정부 대응 구체화 필요성 대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8일(현지 시간) 마감 시한에 맞춰 미국 상무부에 반도체 공급망 관련 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나 업계 우려는 여전하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고객사 정보 등 민감한 내용을 빼고 자료 제출에 임한 만큼, 미 정부의 추가 요구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은 불이익을 받지 않으면서도, 사업 핵심 정보를 내주지 않기 위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이날 제출한 자료엔 고객정보는 물론 재고량 등 기업 내부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제외됐다. 삼성전자는 아예 제출 자료를 모두 기밀로 표시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도록 했고, 메모리 반도체가 주 품목인 SK하이닉스는 미국이 심각하게 여기는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과 자사의 사업이 연관성이 낮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는 물론, 일본 르네사스 등의 기업도 공개된 제출 서류 항목 대부분을 공란으로 처리했다. 추가 자료에 대해서도 ‘제한(restricted)’을 걸고 제출해 미 정부 외엔 열람할 수 없도록 했다.
이스라엘 파운드리 타워세미컨덕터는 제품별 최대 고객사 3곳을 묻는 항목에 대해 “당사는 나스닥 상장 기업으로서 해당 정보를 밝힐 수 없다”라고만 적었다. 이번 설문은 일상적인 정보에서부터 회사 사정에 개입하는 질문까지 총 26가지 문항으로 이뤄져 있는데, 기업 대부분 제품별 재고와 최근 판매량 등 문항은 아예 공란으로 비워놓는 등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문제는 미 정부의 추가 요구 가능성이다. 이번 자료 제출 요청이 차량용 반도체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취지였던 만큼, 공급망 문제가 제때 해결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이미 한 번 자료를 취합한 만큼, 요청 범위는 더욱 상세하고 민감한 영역까지 넓혀질 가능성도 크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이날 기업들이 반도체 재고 및 판매 데이터 제출에 성실히 응하지 않았을 시 '국방물자생산법' 등을 동원해 추가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 정부는 ‘자발적 제출’이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으로선 반강제적 조치라 자료 제출 자체를 피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단 지금 기조로 봤을 땐 반도체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지속해서 (자료) 업데이트를 요구할 것 같다”라고 내다봤다.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차량용 반도체 부족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반도체 부족 문제가 길게는 2~3년에 이르는 장기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의도가 단순히 반도체 부족 문제 해결뿐 아니라 반도체 패권 잡기에 있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반도체 부족 사태가 나아진다고 해도 무리한 요구가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 연구위원은 “예를 들어 ‘중국 견제를 위한 관련 업체 공급망 배제’라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면 미국은 (다른 기업들의 상황을) 계속 관찰해야 한다. 이를 위한 자료 제출 요구를 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했다.
특히 미국이 주도하고자 하는 제조 공급망을 현재 많이 보유한 곳이 동아시아라는 점에서, 국내 반도체 정책에도 입김을 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팽배하다. 기업은 무리하게 반기를 들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돼 정부 차원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송기호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향후 (미국은) 한국의 반도체 정책에도 관여하려 할 것”이라며 “이에 대한 면밀한 대비가 필요하다”라며 국가핵심기술 법안 보완을 제언했다. 미국이 요구한 삼성과 SK하이닉스 반도체 기술정보가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이 지칭하는 국가 핵심기술에 해당한다는 취지에서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지난달 20일 산업통상자원중기벤처위원회의 종합감사에서 "(이번 자료 제출 이후) 너무 부당하거나 우리 산업에 부담이 되는 자료를 요구하는 상황이 지속할 경우 정부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