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떽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에는 이 구절과 함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이 나온다. 최근 상장폐지 결정이 내려진 신라젠의 주가 그래프를 보면 꼭 이 소설 속 모자와 같은 모양새다. 코끼리의 코를 타고 오른 주가는 머리와 등줄기를 따라 상승했다가 엉덩이와 꼬리를 따라 급락했다. 이후 거래 중지된 선은 모자의 챙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마치 보아뱀처럼 신라젠은 소액 투자자들도 삼켜버렸다. 신라젠에 투자한 소액주주의 수는 17만4186명(2020년 말 기준). 이들이 갖고있는 주식은 무려 92.60%에 이른다. 바이오 투자 열풍을 이끌었던 신라젠의 화려한 위상을 보여주는 숫자이나, 이제 신라젠은 주주들에게 악몽이 됐다.
2016년 12월 6일. 신라젠 상장 첫날. 시초가 1만3500원을 형성한 신라젠은 시초가에도 못미치는 1만2000원대에 거래를 마쳤다. 한때 1만 원선 아래로 떨어지는 등 이후 주가 흐름은 더 좋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신라젠이 바이오 대장주로 군림하며 코스닥 시장을 평정할 것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7년 후반 ‘꿈의 신약’으로 여겨졌던 ‘펙사벡’(Pexa-Vec)이 주목을 받으면서 신라젠의 주가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특히 신약 출시 전 마지막 관문인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주가는 15만2300원까지 급등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주가가 15배나 오른 것이다. 당시 신라젠 시가총액은 10조 원으로 코스닥시장 시총 2위를 기록했다.
기쁨도 잠시 ‘펙사벡’이 2019년 미국에서 임상 중단을 권고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젠은 “당사는 8월 1일 오전 9시(미국 샌프란시스코 시간)에 DMC와 펙사벡 간암 대상 임상 3상 시험(PHOCUS)의 무용성 평가 관련 미팅을 진행했으며 진행 결과 DMC는 당사에 임상시험 중단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이 소식에 전해진 직후 신라젠은 연일 하한가를 기록했고 불과 나흘 만에 신라젠의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사실 신라젠 몰락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펙사벡’ 임상 실패 이전부터였다. 주가 역시 이미 하락세였다.
시작은 문은상 전 신라젠 대표의 1300억 원 규모의 주식 매도 소식이 전해진 2018년 초부터였다. 펙사백을 내세우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회사 대표가 갑작스럽게 대규모 주식을 매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은 술렁였다. 때마침 흘러나오던 치료제 개발 난항 루머까지 겹쳤다.
회사는 “(문은상 대표의) 주식처분은 국세청 세금납부와 채무변제를 목적으로 불가피한 사항”이라며 발 빠른 대응에 나섰고, 논란도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펙사벡 개발을 놓고 끊임없이 잡음이 새어 나오면서 주가가 좀처럼 힘을 받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주요 주주들의 지분 매각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회사에 대한 불신은 더 커졌고, 주가는 6만 원 선을 하회했다.
결국 펙사벡이 임상 3상 중단을 권고받은 것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주가는 3만 원대까지 고꾸라졌다. 여기에 검찰이 신라젠 임원들의 ‘미공개정보 이용’ 혐의를 들고 나오면서 주가는 상장 당시 수준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임직원들의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상장 적격성 실질 심사 사유가 발생, 2020년 5월 주식 거래까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펙스벡' 임상 실패도 신라젠 몰락의 원인이 됐지만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더 큰 치명타가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주식 거래가 중단된 지 1년 8개월만인 지난 19일 한국거래소는 결국 신라젠의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거대한 보아뱀이 돼 신라젠을 통째로 삼킨 것이다. 이로 인해 신라젠은 코스닥의 ‘총아’에서 ‘문제아’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신라젠이 최종 퇴출되까지가는 아직 절차가 남았다. 업일 기준 20일 이내 열리는 코스닥시장위원회에서 상장폐지 또는 개선기간 부여 여부를 재차 심의한다.
그러나 신라젠이 다시 살아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은 절차에서 최종 퇴출 결정이 내려지면 신라젠은 정리매매 절차에 들어가고 주주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게 된다.
한때 증시에서 바이오주 열풍의 주역이던 신라젠이 퇴출 위기에 놓이면서, 바이오주의 부활 역시 힘들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