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우리가 낸 기금을 자본시장에 투자합니다. 고갈이 불 보듯 뻔한 연금을 가지고 이익을 남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수혜자에게 더 많은 이익을 넉넉하게 돌려주겠다는 취지이지요.
이들이 굴리는 기금이 적잖습니다. 작년 1월 기준으로 물경 855조 원에 달합니다. 한 해가 지났으니 더 늘었겠군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요 기업은 국민연금이 2대 또는 3대 주주입니다. 일부 IT 기업은 창업주를 제치고 국민연금이 최대주주가 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민간기업이 아닌, 나라가 거머쥔 공기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대한민국 최고 부자는 삼성과 LGㆍ현대차 등 주요 기업이 아닌 “국민연금이 진짜 부자다”라는 이야기마저 나옵니다. 그만큼 기업경영에 연기금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분이 많다 보니 수탁자책임 원칙, 이른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2018년부터입니다. 투자를 단행한 기업에 대해 주주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고 공언한 것이지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ㆍ일본 등 전 세계 20여 개국 연기금이 다양한 형태로 이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거머쥔 지분에 비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수익을 내기 위한 것보다 기업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 때문이지요.
비난이 커지다 보니 지난해 주주총회에서는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속내를 살펴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대기업에는 더 날을 세운 것으로 나타났으니까요.
국민연금은 지난해 대기업 집단 소속 상장사의 주총 때 주요 안건에 대해 날을 세우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반대율은 10.1%로, 전년의 9.1%에 비해 1.0%포인트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반대 견해 대부분이 정작 주총에서는 부결되기 일쑤였습니다. 지분은 막대하지만, 그 지분만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국민이 낸 855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기금을 들고 으름장만 놨을 뿐, 효과는 없었다는 지적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들을 두고 "종이호랑이"로 폄훼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비난이 거세지자 이제 의결권 행사 대신 주주대표 소송을 본격화한다고 합니다. 대표 소송 결정 주체를 산하 전문기구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로 일원화하는 방안을 추진한 게 이런 맥락입니다. 이제 법대로 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국민연금은 기업이 고의나 과실로 법령, 기업 정관을 위반한 행위가 확정됐는지를 고려해 대표 소송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송의 과정을 단순화하겠다고 합니다. '내용증명'을 남발하겠다는 의미로 들리지 않나요?
재계는 이를 두고 국민연금을 시작으로 한 무더기 소송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승소 가능성, 시장 영향, 회수 가능성 등을 고려해 손해액이 큰 몇몇 기업을 중심으로 소송을 준비 중이라는 보도까지 나옵니다.
물론 연기금의 고민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막대한 지분을 쏟아 넣은 기업 방만한 경영을 방관할 수도, 거꾸로 과도한 경영권 개입에 나설 수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런 고민에 고민을 반복하라고 국민연금 관계자들에게 그 자리를 내준 것입니다.
곧 주요 기업의 주총이 시작됩니다.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를 앞두고 "자본시장의 투명성 강화"라는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새 정부 출범 초기, '이쁨' 한번 받아보겠다며 당선인의 공약을 멋대로 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