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방 정보기관들의 ‘말’이 많아졌다.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은 약속이나 한듯 러시아군 전황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동태를 공개하고 있다. 통상 정보기관들은 수집된 정보를 비밀에 부친다. 이들 정보기관들이 부쩍 ‘진솔해진’ 이유는 뭘까.
영국 도·감청 전문 정보기관인 정부통신본부(GCHQ) 제러미 플레밍 국장은 지난달 28일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정보를 자세하게 투척했다. 무기 부족에 시달리고 사기가 저하된 러시아 병사들이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국 무기를 파괴하고 있으며 실수로 항공기도 격추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정도와 러시아군의 전황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보고받지 못하고 있다고도 했다.
미국도 움직였다. 케이트 베딩필드 백악관 공보국장은 지난달 30일 언론에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군에 의해 오도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며 “푸틴의 참모들이 그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전장에서 얼마나 나쁜 성과를 내는지,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제재로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처했는지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얼마나 잘못된 정보를 받고 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정확하지 않지만 푸틴이 고립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푸틴이 일부 참모들을 가택연금하거나 해고했다는 신호가 있다”고 덧붙였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은 푸틴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정보기관들이 취합한 기밀 정보를 공개하는 일은 이례적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영국 정보기관이 이렇게 ‘말이 많은’ 곳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CNN도 정보기관이 이렇게 솔직한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평가했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도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티브 홀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 러시아 작전 책임자는 “정보기관들이 파악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내부 상황을 공개해서 놀랐다”며 “정보와 방법 보호가 뿌리 깊게 박힌 요원들로서는 긴장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관례를 깨고 서방 정보기관들이 일제히 정보들을 공개한 배경에 대해 일종의 ‘심리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러시아가 허위 정보를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기획’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전부터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며 전쟁 정당화를 시도했다.
실패한 전쟁이란 이미지는 서방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러시아의 맹공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사기 진작에도 나쁠 게 없다. 또한 서방이 자신들의 대응방식이 효과가 있음을 강조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동맹 결속은 강화하는 반면 적의 내분을 조장할 여지도 생긴다. 러시아군의 굴욕적인 상황은 러시아 군부, 정치권 내부의 불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정보전을 통해 푸틴을 흔들고 우크라이나를 측면 지원하고 있다. 전쟁에서 '정보'가 탱크나 병력만큼 중요한 무기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